김밥왕이 될 여자, 김밥집(@gimbapzip) [브랜더쿠]
인터비즈 조지윤 기자 2023. 5. 2. 11:03
‘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
여기, 김밥왕을 꿈꾸는 여자가 있다.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먹은 김밥 1만 줄이 그의 무기. 하루 5끼를 김밥으로 꽉꽉 채워 먹을 정도로 진심이다. 맛있는 것은 널리 알려야 제맛! SNS 계정 ‘김밥집(@gimbapzip)’을 만들어 김밥 맛집을 엄선해 올린다. 어느새 9만 6000여명의 팔로워가 생겼고 김밥 덕후들을 모아 커뮤니티 ‘김밥순례’도 운영하고 있다. 내달 중 엄선한 김밥 맛집 136곳을 소개하는 책도 출간할 예정이다. 그의 이름은 정다현, a.k.a ‘세상에서 김밥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다.
직업은 취준생, 취미는 장사
다현 씨가 처음부터 김밥 인플루언서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여느 대학생과 마찬가지로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주변 친구들은 하나둘 취업 소식을 알리는데 그는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이 때 친구가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재밌게 살아보자"며 커피 장사를 제안했다. 그것도 특이하게 '산 정상'에서. 이렇게 첫 커리어로 커피 장사를 시작했다.
첫 장사 무대는 삼천포에 있는 각산(해발 398m). 다현 씨는 친구와 함께 1000원짜리 커피팩과 얼음컵을 등에 지고 산에 올랐다. 젊은 사람이 산에서 커피를 팔고 있으니 등산객들이 관심을 보였다. 하루 종일 커피를 팔아봐야 3만 원 남짓 벌었지만 돈보다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 특히 장사가 적성에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경험을 살려 지난 2016년 세일즈를 결합한 국토대장정 ‘청춘부보상’에 참여했다. 만 29세 미만의 청년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회적 기업의 향토 물품을 판매하는 프로그램이다. 그의 팀에 배정된 상품은 육포. 처음에는 지레 겁을 먹고 가게 문 앞에서 되돌아가기도 수차례. 결국 첫날 판매 순위 꼴등을 차지하고 말았다. 다음날부터는 무대뽀 정신으로 ‘일단 들어가고 보자’며 보이는 가게마다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잡상인으로 오해 받고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다현 씨는 “스물 다섯 생에 그렇게 많은 거절을 당해보기도 처음이었어요.”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시도가 늘어나면서 실패 뿐만 아니라 성공의 횟수도 늘어갔다. 특히 ‘착한’ 기업이 만든 제품이고 판매 금액을 전액 기부한다고 설명하자 사람들은 점점 관심을 보였다. 여기다가 3팩을 사면 할인해주는 등 그만의 판매 전략을 입혔다. 덕분에 다음 날 1위를 탈환했고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쭉 1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청춘부보상을 통해 장사에 재미를 느끼고 이듬해 지인 5명과 함께 수제 버거집을 창업했다. 하지만 대차게 말아먹고 1년만에 문을 닫아야만 했다. 열정만 있고 지식은 없었기 때문일까 자책했다. 기본부터 다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2018년 F&B 대기업의 마케터로 입사했다. 일은 재미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회사 이름을 빼면 남는 것이 없다는 불안과 더불어 5년 뒤에도 지금처럼 살고 있을 것 같다는 막막함이 엄습했다. 부품으로 남기 싫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그는 지난 2020년 9월 사표를 냈다.
새롭게 찾은 아이템 ‘먹스타그램’, 하지만 이마저도…
회사가 전쟁터라면 회사 밖은 지옥이고, 퇴사가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니라는 것을 퇴사 전에 알았다면 더 좋았을까. 회사 이름에 기대기는 싫었지만 회사 밖에서 본 스스로는 더욱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또다시 우울한 날을 보내던 중 다현 씨는 종이에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빼곡히 적어 봤다. 걸어온 길을 관통하는 것은 결국 ‘음식’이었다.
여기에 SNS를 더했다. 취미가 등산이던 그는 2019년부터 등산 인플루언서(@hiking_hyeon)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꾸준히 기록한 결과 1만 2000명의 팔로워를 모았고 채널 관리법도 조금씩 터득해갔다.
하지만 처음부터 김밥에 집중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모든 먹거리를 대상으로 ‘먹스타그램’을 운영했다. 다현씨가 먹스타그램을 시작하던 2020년 초반에는 사진 위주의 음식 리뷰 계정이 대세였다. 그는 여기에 글솜씨를 더했다. 음식의 맛 뿐 아니라 재료, 가게의 분위기 등 추천 이유를 상세히 쓴 음식수필집 ‘푸글(@foogeul)’은 그렇게 탄생했다.
푸글은 빠르게 성장했다. 1년만에 팔로워 11만명(2023년 4월 기준 13만 3000명)을 모았다. 광고 수입도 늘어났고 각종 매거진에서 음식 관련 원고 연재 요청도 들어왔다. 비결은 바로 독특한 네이밍에 있었다. 일례로 다현 씨는 서울역 맛집 오제제의 말차 자루우동을 리뷰하면서 ‘슈렉이 기부한 머리카락’이란 별칭을 붙였는데 이 별칭이 다른 SNS 채널에서도 그대로 차용하면서 바이럴 됐다.
푸글은 또다른 경쟁력은 사진에 있었다. 초기에는 사진을 맛깔스럽게 찍는 법을 잘 몰랐지만 사진이 쌓이고 그 중 ‘좋아요’가 많은 사진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 사진의 구도를 찾아냈다. 실제 같은 시간대 같은 종류의 사진을 올려도 사진의 구도, 색감에 따라 팔로워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예컨대 햄버거는 단면이 보이게 수평적으로 찍을 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늘어나는 팔로워 수와 비례해 다현 씨의 근심도 깊어졌다. 유사 계정들이 우후죽순 등장해 차별화가 어려운 점도 문제였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다현씨에게 있었다. 인기를 끌기 위해 유행하는 음식만 찾아 다니고 사람들한테 반응이 좋을 것 같은 비주얼에만 집중하다 보니 음식 리뷰를 하는 즐거움이 사라진 것. 좋아하는 것을 하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남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는 스스로에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나만이 할 수 있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고민했다. 그 고민의 끝에 찾은 결론이 바로 ‘김밥’이었다.
김밥도 깊어지면 브랜드가 된다
김밥은 단연코 다현 씨의 최애 음식이다. 어린 시절,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던 탓에 비싼 외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집 앞 골목에 있는 김밥가게에서 ‘김밥’만큼은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맛이 달라져서 매번 새로운 음식을 먹는 듯한 즐거움도 있었다. 그때의 추억 덕분인지 이제 돈도 벌고 다양한 음식을 맛봤는데도 김밥이 제일 맛있었다.
솔직히 김밥만 올리는 계정이 소구력이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먹스타그램 세계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비주얼만이 살아남는다. 더군다나 김밥은 소풍을 가거나 간단하게 한끼를 때울 때 자주 찾는 메뉴. 인스타그램으로 맛집을 검색할 때 ‘굳이’ 찾는 음식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푸글이라는 잘 나가는 계정이 있었기에 다현 씨는 인기나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고 새로운 계정을 만들 수 있었다. 자신처럼 김밥을 좋아하는 사람 딱 1000명만 모으고 싶다는 바람에서 지난 2021년 12월 ‘김밥집’을 시작했다.
음식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어왔기에 글을 쓰고 사진 찍는 게 어렵지도 않았다. 가게만의 특색 있는 재료를 설명하고, 김밥 싸는 과정과 곁들여 먹으면 좋을 음식까지 함께 기록했다. 이전에도 김밥 전문 SNS 계정이 몇 있었지만 각 김밥의 특징을 전문적으로 분석한 계정은 김밥집이 유일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터득한 음식을 맛있어 보이게 찍는 구도도 적극 활용했다. 김밥은 길게 늘여 놓은 것 위에 단면을 보이게 할 때에 반응이 가장 좋다고 팁을 준다. 매번 같은 구도면 지겹기 마련. 특색 있는 재료를 중심으로 찍거나 오래된 가게일 경우 간판을 올리기도 한다. 해당 가게의 핵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곳곳에 숨어 있던 김밥 마니아들이 반응했다. 전국 각지의 김밥 맛집에 대한 제보도 속속들이 들어왔다. 다현 씨는 그곳들을 지도에 빼곡하게 저장해놓고 따로 검색을 해 2차 조사를 마친 후 김밥일주를 다녀오기도 한다. 지난 2021년 봄에 처음 떠났는데 20일 동안 삼시세끼 내내 김밥을 먹었을 정도다. 초반에는 하루에 다섯 번도 먹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모습에서 올드보이 최민식이 겹쳐 보였고 세 번으로 줄였다고 한다. 그렇게 지방 곳곳을 다니면서 기록한 김밥 가게에 대한 정보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김밥 1만 줄을 먹었다고 자부하지만 최애 김밥은 집김밥 무드의 고소한 김밥이다. 그래서일까. 김밥집 계정에는 특별히 비싼 재료를 넣은 김밥보다도 솥에 밥을 지었거나 당근채를 마늘에 달달 볶아 향을 내는 등 ‘기본’에 충실한 김밥이 많이 보인다.
사실 가끔은 ‘나만 알고 싶은 집’이 있기도 하다. 충남 아산에 ‘정터진 김밥왕’이 그런 곳이었는데 다녀온지 5개월이 돼서야 계정에 올렸다. 토치질을 해서 우엉에서 불맛이 나는 데다가, 조리 과정에서 몇 차례 레이어링을 하는 덕분에 고기가 없는데도 고기맛이 난다며 거듭 추천했다.
김밥집의 팬인 ‘밥풀이’들을 모아 커뮤니티 ‘김밥순례’도 만들었다. 격월로 모집해서 기수제로 운영하고 있다. 단지 만나서 김밥을 먹고 헤어지는 모임은 아니다. 매 기수마다 주제는 달라지는데 확실한 것은 보람있는 일을 하겠다는 의지다. 1기는 새해를 맞아 연탄봉사를 진행했다. 연탄이랑 김이 색깔이 같다는 데서 따왔다. 봉사의 마무리는 당연히 김밥. 아직은 카카오톡 단체방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올해 중 웹페이지를 오픈해 본격적인 김밥 커뮤니티를 만들어갈 계획이다.
다녀온 김밥 맛집이 400곳을 넘어가자 그중 제일만 꼽아 책을 내고 싶다는 꿈도 슬며시 피어 올랐다. 다현 씨는 136곳을 추려내 정리했고 출판사들의 문을 두드렸다. 수없이 거절 당한 끝에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을 펴낸 ‘가디언’에서 4월 중 발간할 예정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궁극적으로는 신개념 김밥 프랜차이즈를 열어 분식 시장의 판도를 바꾸겠다는 포부. 김밥천국 등으로 대중화된 김밥이 ‘바르다 김선생’, ‘김가네’로 프리미엄화 된 것을 넘어 색다른 변화가 필요한 때라는 분석이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뚜렷한 아이디어는 없어서 더 많은 김밥을 먹고 연구해야 한다며 웃어 보인다.
남들 다 하는 취업, 왜 나는 못할까? 하는 걱정에 잠 못 이루던 청년은 ‘남들 다 하는’ 것에 집중하기를 멈췄다. 그 대신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인터뷰 내내 웃음을 보인 그는 사뭇 진지하게 ‘김밥왕’이라는 꿈을 말한다.
“진심으로 김밥왕이 되고 싶어요. 김밥은 안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에 따라 얼마든 달라질 수 있는 데다가 영양학적으로도 완전 식품입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승산이 있다고 보는 이유죠. 김밥도 깊어지면 브랜드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인터비즈 조지윤 기자 geor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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