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원, 최고 희극인의 마지막 가는 길

하재근 문화 평론가 2023. 5. 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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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고 엔터테이너에서 나락으로 ‘뚝’…파란만장 인생사

(시사저널=하재근 문화 평론가)

서세원 사망 이후 논란이 계속 이어졌다. 언론이 사인과 관련된 여러 가지 미스터리를 전했다. 그러던 중 서세원이 숨진 곳에 CCTV가 있고 현재 영상 복구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 영상을 통해 논란이 정리될 가능성이 있다. 유족 사이에 이견이 있다는 보도도 나왔는데, 이 문제도 유족 간 협의로 곧 정리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진실은 제대로 규명돼야 하고, 서세원이 국민적 유명인이니만큼 관심사가 되는 것도 피할 순 없다. 그런 점을 감안해도 최근 언론의 보도 태도는 조금 과해 보인다. 너무 이 사건을 미스터리 파헤치기 식으로 접근한다는 느낌이다. 가족 내부 문제를 과도하게 시시콜콜 따지는 느낌도 있다. 서세원이 워낙 큰 논란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언론이 계속 그를 논란의 캐릭터로 내세우는 것 같다.

아내 서정희씨를 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서세원씨가 2015년 5월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선고공판이 끝난 후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20여 년간 방송가 주름잡았지만…

서세원은 장장 20여 년간 방송엔터계에서 승승장구했다. 1979년 TBC 라디오 《개그 콘테스트》로 데뷔해 라디오 진행자로 활동하다 MBC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 후 《영11》 《청춘행진곡》 《일요일 일요일 밤에》 등에서 맹활약하며 최정상급 개그맨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시는 젊은 코미디언들이 '우린 바보 연기나 몸으로 웃기는 코미디언이 아니라 말로 웃기는 개그맨이다'며 새로운 물결을 형성한 시기였다. 그 젊은 개그맨 중에서도 최정점에 섰던 이가 서세원이었다.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셔'라는 희대의 유행어를 비롯해 유명 목회자의 말투를 흉내 낸 '셔셔셔' '믿습니까' 등의 말들을 유행시켰다.

당시 코미디 스타는 요즘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그때 원톱은 심형래였는데 연예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서세원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톱 개그맨으로 국민적 스타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1986년에 영화 《납자루떼》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대실패가 서세원 20여 년 전성기에 유일한 오점으로 남았다. 개그맨 활동만으로 최고 자리를 누리면서 살 수 있었는데 굳이 영화감독에 도전한 데서 그가 안주하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며 꿈을 좇는 성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영화에 대한 꿈이 크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 사업에 대한 도전이 나중에 그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고 만다.

1990년대엔 토크쇼 사회자로 변신했다. 《서세원쇼》를 진행하며 사회자로 정점에 선 것이다. 그 전까진 예능 사회는 아나운서나 전문 사회자가 주로 봤는데 서세원이 성공하며 개그맨 출신 예능 사회자들이 전성기를 열게 됐다. 유재석, 탁재훈 등 재간꾼들이 《서세원쇼》를 통해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다. 1995년 KBS 코미디대상 대상을 수상했고, 1997년 문화체육부장관상 표창, 1999년에는 제6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희극연기상을 수상했다.

영화 제작자로 변신해 2001년에 영화 《조폭 마누라》를 성공시켰다. 이때가 서세원의 세 번째 정점이었다. 개그맨으로, 예능 사회자로, 영화 제작자로 연이어 정점에 오른 것이다. 《납자루떼》 대실패 이후 기어이 영화에서 성공한 서세원에게 많은 이가 열광했다. 이때까지는 그를 향한 시각이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영화 사업이 화근이었다. 《조폭 마누라》 후속작인 《긴급조치 19호》가 실패했고 그 후 작품들도 줄줄이 실패했다. 또 사업하는 과정에서 부정비리 혐의를 받았다.

2002년에 방송사 PD에게 금품을 전달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영화 제작사 횡령 의혹, 세금 포탈 혐의 등으로 2006년 대법원에서 징역 10월과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2009년에도 주가 조작 및 회사 자금 횡령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2010년에 KBS 출연 금지 처분이 나오면서 방송계를 완전히 떠나게 된다. 여론이 극도로 악화됐다. 이런 가운데 그가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도 논란이 됐다. 그가 목회를 한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서 황당한 가십으로 소비됐다. 

2014년에 서세원을 국민 공적으로 만든 사건이 터졌다. 이혼소송에 이은 서정희 폭행 논란이다. 연예계 대표 잉꼬부부였기 때문에 이혼소송 자체부터가 큰 충격이었다. 그러던 중 그가 서정희에게 위력을 행사하는 CCTV 영상이 공개돼 서세원에 대한 여론이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악화됐다. 결국 서세원은 이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돼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목회 교단에서도 제명됐다고 알려졌다.

사업 실패·가정폭력 등으로 온갖 구설에 올라 

그를 향한 시선이 너무 따갑고,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언론에 부정적으로 보도되는 상황에서 국내 사업은 힘들었던 것 같다. 이혼 1년 만인 2016년에 23세 연하 해금 연주자와 재혼한 후 딸을 얻은 그는 캄보디아로 출국했다. 국내 전원주택 사업으로 수십억원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것을 종잣돈 삼아 재기를 꿈꿨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간 곳이 의료 인프라 등이 미비한 지역이었다.

한때 3조원대 규모 복합건설사업권을 취득해 부동산 개발사업과 국영 스포츠 TV 경영권 인수 등을 추진한다고 알려져 세인을 놀라게 했지만 코로나19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사기도 당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당뇨 문제가 심각했다고 한다. 사업에 매진하느라 몸을 추스를 수 없었다. 현지 상황이 정상적으로 치료받거나 식이요법 같은 것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코로나19 사태가 정리되면서 사업에 더욱 매진하던 차에 이번 일이 터졌다는 것이다.

서세원은 "환갑에 탄생한 딸아이는 제 삶의 전부"라며 "가장 힘들고 고된 인생의 기로에서 저에게 빛을 안겨준 천사"라고 했다. "저는 방송인으로 살다 한순간 모든 걸 다 잃었지만, 이 아이를 만난 걸로 개인적으론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한다"라며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캄보디아 사업을 따낸 것도 알고 보면 어린 딸을 둔 아버지의 절실함으로 이해하시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새로 꾸린 가정의 미래를 위해 더욱 일에 매진했던 것 같다. 서세원 사망 후 현 부인은 혼절 지경이고 어린 딸에겐 아직까지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못 하고 있다고 한다. 만약 사업을 하지 않고 서정희에게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방송계 큰 어른으로 인정받았을지 모른다. 20여 년간 국민에게 웃음을 줬던 인물인데 마지막 가는 길까지 순탄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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