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고택, 클래식…이보다 더 낭만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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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1897~1990) 전 대통령 고택.
최나경의 플루트 선율이 박규희의 기타 연주를 타고 흘렀다.
줄리아니의 연주를 본 베토벤이 "기타야말로 작은 오케스트라다"라고 감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악기 편성이 다양한 여러 장르 연주를 한 자라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게 실내악 무대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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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1897~1990) 전 대통령 고택. 최나경의 플루트 선율이 박규희의 기타 연주를 타고 흘렀다. 파릇한 잔디가 돋아난 마당에서 펼쳐진 ‘고택음악회’였다. 향나무 위로 까치가 날고, 처마 밑을 가로지르는 비둘기가 날개를 퍼드덕거렸지만 400여 청중은 숨죽여 연주에 몰입했다.
윤보선 고택은 사적 제438호다. 한때 민족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었다. 이상재, 한규설 등 애국지사들이 근대 교육을 꿈꾸며 설립한 ‘조선교육협회’가 발족한 곳이요, 함석헌, 박형규 목사 등 재야·민주 인사들의 회합 장소였다. 서슬 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엔 인권운동가들의 도피처였고, 1980년 ‘서울의 봄’엔 윤보선이 김대중, 김영삼을 불러 단일화를 중재했던 곳이다. 이제 봄이면 이곳에선 실내악이 울려 퍼진다.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이 18년째 이끌어온 서울스프링실내악 축제가 2006년부터 시작한 고택음악회다. 처음엔 후원 회원들만 초대했는데, 2015년부터 일반 청중에도 개방했다. 지금은 가장 먼저 매진되는 이 음악제의 ‘대표상품’이 됐다. 현대사의 중요한 공간이 시간이 흘러 실내악 무대로 변모한 것이다.
플루티스트 최나경과 기타리스트 박규희는 세계 무대를 누빈 정상급 연주자. 줄리아니(1781~1829)의 ‘플루트와 기타를 위한 그랜드 세레나데’를 듀오로 연주했다. 줄리아니의 연주를 본 베토벤이 “기타야말로 작은 오케스트라다”라고 감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최나경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공간에서 음악을 공유하게 돼 기쁘다”고 했다. 곡들이 바뀔 때마다 연주자 가운데 한 명이 짤막하게 해설을 했다. 피아니스트 김규연은 “작곡가가 돼지처럼 연주하라고 했다는데 우리는 4악장에서 적토마처럼 달려보겠다”며 웃었다. 프랑스 작곡가 장 프랑세(1912~97)의 ‘오보에, 바순, 피아노 3중주’였다. 베토벤의 초기 작품인 ‘클라리넷 3중주’ 연주에 앞서 프랑스 클라리넷 연주자 로망 귀요는 “모든 이를 위한 음악이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윤보선 고택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은 보석 같은 공간이다. 나무들이 울창하고 마당엔 사각 모양의 작은 연못도 있다. 현재 보선 전 대통령의 장남 가족이 거주 중이어서 이런 기회 아니면 관람이 어렵다. 대지 4600㎡규모에 여러 채의 건물이 있는데, 음악회가 열린 곳은 ‘산정채’란 별채 마당이었다. 벽면에 ‘유천희해(遊天戱海)’란 큼지막한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에서 노닐고 바다에서 즐긴다’는 뜻이니, 기개와 여유가 묻어난다. 실내악을 연주하는 장소와 제법 어울리는 휘호다.
실내악은 2~10명 안팎이 소규모로 연주한다. 유럽 궁정 문화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좁은 공간, 단출한 무대에서도 접할 수 있게 됐다. 악기 편성이 다양한 여러 장르 연주를 한 자라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게 실내악 무대의 장점이다. 이번 실내악 축제에서도 2중주부터 8중주까지 골고루 만날 수 있다. 오는 7일 폐막 공연은 아예 세 곡의 8중주를 연주하는 ‘8중주 오디세이’다.
야외에서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엔 날씨 제약이 많다. 이날도 처음엔 내리쪼이는 햇볕에 피아노 연주자가 눈을 찡그려야 했는데, 끝날 무렵엔 그늘이 지면서 가벼운 냉기가 흘렀다. 음향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기와를 얹은 고즈넉한 한옥 마당에서 듣는 실내악엔 독특한 멋과 운치가 있다. 봄바람에 악보가 날리고, 새들의 협연이 더해지며 야외 공연만이 주는 특별한 감흥을 자아내는 듯했다. 고택음악회는 오는 5일 어린이날에 한 차례 더 열린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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