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의 상징’ 48m×29m 공간… 궁궐행사·백성소통 ‘다중 역할’[10문10답]

박세희 기자 2023. 5. 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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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문10답 - 광화문 월대 10월까지 복원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지어
좌우난간 둘러싸인 형태 특징
가운데엔 ‘왕의 길’ 어도 펼쳐져
계단·경사로 등 4단계 구조변화
일제 때 훼손되며 흙에 파묻혀
문화재청, 1890년 이전 형태로
선로 유적 등 옮기며 복원키로
덕수궁 대한문, 원형 고증 작업
돈의문 실물복원도 재추진 예정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월대가 최근 발굴된 모습.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 때 설치된 전차 선로를 걷어내고 월대를 본래 모습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문화재청 제공

최근 광화문 앞을 지난 운전자라면 한번쯤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직선이었던 도로가 반달 형태로 휘어진 것에 관해서다. 갑작스러운 도로 변화에 당황한 초보 운전자라면 또 무슨 공사를 하는 거냐며 투덜댔을 수도 있겠다. 이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월대’를 복원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해 9월부터 발굴조사가 시작됐으며 최근 광화문 월대의 정확한 규모와 변화 과정이 확인돼 본격적인 복원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문화재청은 오는 10월까지 복원을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월대는 무엇이고 광화문 월대 복원의 가치는 무엇인지 살펴본다.

1. 월대란 무엇인가

월대란 궁궐의 정전(正殿)과 같이 중요한 건물에 넓게 설치하는, 기단 형식의 대(臺)를 뜻한다. 높이는 약 1m 전후이며, 2단으로 구성되기도 했다. 건물의 격을 높이고 웅장해 보이도록 하는 효과를 가지며 하례(賀禮), 가례(嘉禮), 제례(祭禮) 등 궁궐 내 각종 행사나 의식을 치를 때 활용됐다.

월대는 경복궁 근정전 등 건물에 설치되는 것과 광화문을 비롯한 대문 앞에 설치되는 것으로 나뉘는데 건물 앞 월대는 중국, 일본 등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도 흔하게 나타나는 반면 대문 앞 월대는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된다.

‘넘을 월’ 자를 쓰는 월대(越臺)와 ‘달 월’ 자를 쓰는 월대(月臺)가 함께 사용되나 ‘달을 바라보는 평평하고 높은 대’의 의미로 월대(月臺)가 더 널리 통용된다. ‘달을 바라보는 대’라는 뜻의 ‘월견대(月見臺)’에서 기원했다는 설도 있다.

2. 월대, 어디어디에 있나

건물 앞 월대는 조선 시대 각 궁궐의 정전 앞, 종묘 정전 및 영녕전의 앞, 성균관 명륜당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월대 가운데 가장 장대한 것은 종묘 정전의 월대다. 종묘 정전은 본래 정면 7칸으로 지어졌지만 계속 증축돼 19칸의 긴 건물이 됐다. 건물 앞의 월대 역시 규모가 확장됐으며 이곳에선 악공(樂工)과 무인(舞人)들이 올라 월대를 가득 메우고 종묘제례악으로 알려진 ‘보태평’과 ‘정대업’을 연주했다고 한다.

경복궁 근정전의 월대는 상월대와 하월대, 2단으로 구성돼있으며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사신과 쥐, 소, 토끼 등 십이지상이 배치돼 있다는 특징이 있다.

대문 앞 월대의 모습은 창덕궁 돈화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돈화문 월대는 20세기 초 궁궐 안 자동차 통행을 위해 진입로를 만들면서 그 아래로 묻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6년 월대를 덮은 아스팔트를 걷어내 복원했고, 지면의 높이차에 따라 동선이 불편하다는 지적에 지난 2020년 돈화문 월대 개선 공사를 마쳤다.

3. 광화문 월대가 중요한 이유는 뭘까

월대는 각종 의식이 행해지던 기능적인 공간인 동시에, 건물의 위엄과 함께 왕의 권위를 한층 더 높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설물이다. 세도정치의 폐해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왕의 권위와 왕실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실시된 경복궁 중건 당시 흥선대원군은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아 궁과 왕의 권위를 함께 높이고자 했다. 광화문 월대는 좌우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는 다른 대문 앞 월대에선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형태다.

본래 왕의 위엄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월대가 왕과 백성들의 소통 공간이었다는 문화재청의 설명은 흥미롭다.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양숙자 학예연구실장은 “광화문 월대는 궁 밖에 있지만 궁 안과 연결된 유일한 시설이다. 소통 공간의 역할도 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광화문 월대가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로 사용됐을 가능성도 있다.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명나라 사신을 맞을 때 잡희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러 공연이 광화문 앞에서 이뤄졌고 이를 위해 월대가 활용됐을 가능성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23년경 광화문 모습. 문화재청·국사편찬위원회 제공

4. 기록 속 광화문 월대의 모습은

광화문 월대는 1431년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세종 13년 3월 29일, 예조판서 신상(1372∼1435)이 광화문 밖에 섬돌, 즉 월대를 쌓을 것을 건의한 것이다. 신상은 월대가 없어 관리들이 궁을 출입할 때 광화문 앞까지 말을 타고 와서 내려 부적절하며, 명나라 사신이 출입하는 문을 이렇게 누추하게 버려두는 것은 부당하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에 세종은 “지금 바야흐로 농사철에 접어들었는데, 어찌 민력(民力)을 쓰겠는가”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 ‘경복궁 영건일기(營建日記)’에서다. 여기에는 ‘1866년 3월 3일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 모군(인부)이 궁 안에 쌓아둔 잡토를 지고 왔는데, 실로 4만여 짐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5. 광화문 월대의 규모와 변화 과정은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의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광화문 월대의 정확한 규모는 남북 길이 48.7m, 동서 너비 29.7m다. 가운데 임금이 다니던 너비 7m의 어도(御道·왕이 다니는 길)가 존재했으며 월대의 높이는 약 70㎝로 확인됐다.

광화문 월대의 모습은 시간에 따라 4단계로 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1890년대까지 월대 남쪽 계단부는 중앙 어도와 좌우 신하들의 길이 모두 계단으로 돼 있었지만 1900년대 중반 어도 계단이 경사로로 바뀌었고 1910년대 중반에는 동서쪽 계단도 경사로로 변경됐다. 전차선로가 설치된 1923년 월대 좌우 난간석이 제거되고 월대가 모두 흙으로 덮였다. 선로는 1966년까지 사용되다가 세종로 지하도를 조성할 때 콘크리트로 메워졌다.

6. 광화문 월대, 어떻게 훼손됐나

광화문 월대는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 속에서 크게 훼손된 채 땅에 묻혀 있었다.

일본은 강제로 조선을 빼앗은 후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자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인 경복궁부터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민족의 혼을 말살시키기 위한 책략이었다. 경복궁 내 509동의 건물 중 469동을 철거했고 경복궁 근정전 앞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이 헐린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 자체를 가려버렸다. 광화문이 있었던 자리는 총독부 광장이 돼 각종 통치 행사의 장이 됐고, 광화문도 헐려버릴 처지에 놓였으나 건춘문 북측으로 옮겨져 간신히 살아남았다.

광화문 월대 훼손은 이러했던 일제의 만행들과 궤를 같이한다. 일본이 광화문 월대 자리에 전차선로를 설치한 1923년, 월대 좌우 난간석은 제거됐고 어도는 끊겼으며 월대는 모두 흙으로 덮였다. 이때의 기록이 1923년 9월 2일 자 동아일보 기사다. 당시 기사는 “경복궁 영추문∼광화문 사이에 전차를 부설할 예정이어서 광화문 앞 돌난간을 헐어버릴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돌난간은 월대 난간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7. 광화문 월대, 어떻게 복원되나

문화재청은 올 10월까지 일제가 놓은 전차 선로를 치우고 1890년대 이전 버전의 월대로 복원할 계획이다. 이번 달 공사를 시작, 9월까지 기초 및 석공사, 보존처리공사, 포장공사 등을 마치고 10월 준공 및 기념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월대를 덮었던 전차선로 유적 일부는 경기 의왕시 철도박물관으로 옮겨진다.

신 교수는 “남북 길이가 50m에 달하는 월대가 남아 있으리라곤 반신반의했다. 시민들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도로를 변경하며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어도지를 포함한 기단(터보다 한층 높게 돌로 쌓은 단)지가 거의 완전하게 나왔다. 사진 등의 자료들도 있기에 광화문 월대 복원은 문제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8. 광화문 월대 복원의 의미는

1923년 전차선로가 깔리면서 훼손됐던 광화문 월대가 복원되기까지 1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도가 끊어지고 땅속에 묻혔던 광화문 월대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놓는 것은, 일제에 의해 훼손됐던 우리의 유산을 복원해내고 경복궁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신 교수는 또 광화문 월대 복원이 중요한 이유로 ‘완결성’을 꼽았다. “원래 광화문과 월대는 따로 있었던 게 아닙니다. 두 개가 함께 있어야 비로소 진짜 문이 되는 것이죠. 광화문에 담장 없이 문만 하나 세워놓으면 이상한 것처럼 월대가 없는 지금의 모습이 이상한 것입니다. 본래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야죠. 모르면 몰라도 우리 다 알고 있고 고증도 충분히 됐고 고증할 재료도 있고, 도로 변경도 가능하다 하면 복원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겁니다.”

광화문 월대 복원이 완성되면, 지난 1990년부터 이어진 경복궁 복원의 핵심 중 하나가 마무리되는 셈이기도 하다. 1990년 첫 삽을 뜬 경복궁 복원은 2045년까지 무려 55년의 기간을 두고 진행되는 장기 계획이다. 지금도 복원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9. 덕수궁 대한문도 월대 복원 중

대한제국 황궁의 정문이었던 덕수궁 대한문 역시 월대 재현 공사가 한창이다. 하지만 대한문의 경우 광화문과 달리 월대 ‘복원’이 아닌 ‘재현’이다. 현재 대한문이 서 있는 자리가 원래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문은 1970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33m 밀려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자리에 있는 게 아니기에 원래대로 돌려놓는 ‘복원’은 불가능하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는 원위치와 형태, 크기에 대한 철저한 원형고증을 바탕으로 재현한다는 방침이다. 재현 공사는 이번 달 말 끝날 예정이다.

1899년 공사가 시작돼 1900년 즈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문 월대는 고종이 환구단이나 왕릉으로 행차할 때 사용했고, 1910년 대한제국의 명운이 다하는 마지막까지 존재했다. 그랬던 월대가 1919년 고종 국상 때는 보이지 않아 그 전에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10. 돈의문도 다시 복원을 추진한다는데

최근 서울시가 돈의문 실물 복원을 다시 추진한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돈의문은 사대문 중 유일하게 복원이 되지 않았던 곳으로, 2009년에도 복원이 추진됐으나 현실성, 비용 등의 문제로 좌초됐다. 대신 시는 돈의문을 가상·증강현실로 복원했으며 디지털로 돈의문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키오스크를 설치했다.

시는 이번에 다시 한 번 돈의문 실물 복원을 추진하는 내용 등을 포함한 ‘제2기 역사도시 서울 기본계획’을 마련했다. 향후 5년간 총 1조284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할 방침이며, 교통정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새문안로 일부를 지하화하는 등의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돈의문을 원래 위치에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주변 지대를 높이는 작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돈의문터 인근에 들어선 고층 건물들의 부지를 매입해야 하기 때문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일부에선 성토(盛土) 작업은 하지 않고 돈의문 건물 자체만 복원하는 방식이 될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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