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이 사람처럼! <리바운드>로 돌아온 장항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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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아내가 김은희”
영화 <기억의 밤>(2017) 이후 메가폰을 잡은 작품은 영화 <리바운드>다. 이 작품은 2012년 교체 선수도 없이 단 6명의 선수로 전국 대회 결승 진출을 이뤄낸 강양현 코치와 부산중앙고등학교 농구부의 극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현실판 <슬램덩크>(일본의 농구 만화)라 불리며 농구 팬들을 웃기고 울렸던 역사적인 기록인데, 장항준 감독은 6명의 선수와 강양현 코치의 찐한 우정 그리고 이들의 성장 스토리에 집중했다. 다시 말해 자신과 닮은, 사람 냄새 흠씬 풍기는 영화로 컴백한 것이다. 현재(4월 17일) 박스오피스 3위, 누적관객수 48만명을 기록하고 있다. 해외 대작들 사이에서 한국 영화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다.
장항준 감독을 이야기할 때 김은희 작가를 빼놓을 수 없다. 두 사람은 인생의 동반자이자 비즈니스 파트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한 영향력을 주는 관계로 십수 년째 동반 성장하고 있다. 장항준 감독이 연출을 맡은 <리바운드>에도 김은희 작가의 손길이 묻어 있다.
“애초에 권성희 작가(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의 작가)가 틀을 잡았고, 그 시나리오로 연출 제안을 받은 상황이었어요.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검토하고 있는데, 아내가 ‘나 한 번만 보여줘봐’ 하더니, ‘내가 고쳐볼게’라고 하더라고요.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김은희 작가가 참여하게 됐고, 원래보다 조금 더 담백하게 수정됐어요.”
지난해 4월 첫 촬영을 시작했고, 약 3개월 만인 7월에 모든 촬영을 끝냈다. 장항준 감독은 몇 달 동안 편집실에서 많은 분량의 촬영본과 씨름한 끝에 드디어 아내에게 이 작품을 처음 보여주던 날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살다 보니 아내가 김은희”라고 말하는 그의 어깨가 든든해 보였다.
“음악도 없는 편집본을 보고 ‘오빠, 이건 오빠의 대표작이 될 거야’라고 하더군요. 김은희에게 인정받았다는 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시사회 후에는 윤종신 씨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았다며?’라고 하길래 ‘앞으로 뒤로만 걸어가겠다’라고 말했죠.”
사람들이 저를 ‘웃긴 사람’이라고 부르는 걸 알아요.
예능 작가 출신이라 열심히 할 뿐이지
개인적으로는 예능 방송이 힘들고 부담스러워요.
“저는 유행을 안 좋아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외국 영화를 보면 배우의 생김새나 배경이 정말 과거와 똑같잖아요. 영화 속 주인공을 검색하면 배우의 모습이 실제 인물과 똑같아 놀라곤 하죠. 배우가 살을 찌우거나 빼는 이유입니다. 놀라운 싱크로율이 영화의 몰입도를 높이죠. <리바운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리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나라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었죠.”
혹자는 고집이라 말하지만 스스로는 소신이라 말한다. 작은 디테일 하나도 포기하지 않는 신념 때문이었을까? <리바운드>를 본 부산 시민들은 그에게 감사와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해운대와 광안리만이 부산의 전부가 아니에요. 실제 부산 시민들이 시간을 보내는 삶의 터전은 해운대와 광안리가 아니죠. 부산 관객이 <리바운드>를 보고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겁니다. 그들의 진짜 삶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죠. 주인공들이 어떤 환경에서 생활했는지를 보여주는 게 연출적으로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죠. 스태프는 이렇게까지 할 만한 가치가 있나 싶었을지 모르겠지만요.”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고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장항준 감독. 그런데 놀라운 건 이뿐만 아니다. 그는 영화에 어울리는 주인공을 섭외하기 위해 500명의 신인 배우를 만났다. 연기 오디션이 아니라 흡사 농구 오디션이었다. 소위 말해 대한민국의 젊은 남자 배우는 다 만나봤다.
“캐스팅 기준이 있었어요. 선수로 출연하는 배우는 유명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몰입을 방해할 수 있거든요. 진짜 선수처럼 보일 수 있는 배우를 섭외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500명이 넘는 신인 배우 농구 오디션을 대대적으로 시행했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배우를 기용한다는 것은 연출자로선 모험이다. 대개는 유명 배우를 섭외하고, 스토리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여배우를 투입하기도 한다. 그런데 장항준 감독의 선택은 달랐다. 이신영, 김택, 정건주, 김민, 안지호. 이름이 낯선 이 젊은 배우들로 현장을 채웠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다.
“평소에도 느낌을 중요시하는데, 이번에는 특히 더 느낌에 기댔습니다. 느낌이 좋아서 이신영 씨를 캐스팅했죠. 드라마는 조연으로 몇 작품 했지만 영화는 처음인 배우였어요. 하지만 연기도 곧잘 했습니다. 신인인데도 담백하고 담담하게 연기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보자마자 ‘이 친구다’ 싶었달까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장항준 감독 마음에 쏙 들었던 배우 이신영은 농구를 못했다. 농구 영화를 찍어야 하는데 치명적인 문제였다. 심지어 농구를 제일 잘해야 하는 캐릭터였다. 며칠 고민하던 장항준 감독은 스태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신영을 다시 불렀다.
“농구하는 흉내라도 낼 수 있겠냐고 물었어요. 어떻게든 CG로 해볼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죠. 이신영 씨를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났더니 농구 선수가 돼 있더군요. 매일 레슨 받고, 혼자 연습하고, 영상을 계속 보았다고 해요. 계속 발전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CG나 대역을 쓰지 않아도 되겠다고 판단했고, 바로 캐스팅을 확정했습니다. 그때 다시 한번 느꼈어요. 안 해서 안 되는 겁니다. 하면 됩니다.”
놀라운 변신을 보여준 건 이신영뿐만 아니다. ‘강양현’ 코치 역을 맡은 안재홍 역시 믿을 수 없는 변화로 그의 신뢰를 얻었다.
“안재홍 씨가 가진 평범함 속의 독특함이 좋았어요. 보편적인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 안에 다양한 면모가 존재하죠. 그래서 강양현 코치 역은 안재홍 씨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그가 시나리오를 좋아했고, 순식간에 만남이 성사됐어요. ‘살을 좀 찌워야 할 것 같다’고 말했더니 일주일 만에 10kg을 찌워서 오더군요. 그때 드라마 <멜로가 체질>이 끝난 직후라 살이 쪽 빠진 상태였는데도 말이죠.”
장항준 감독의 코칭 아래 안재홍은 강양현 코치가 됐다. 말투, 자세, 목소리, 태도까지 마치 복사라도 한 듯하다. 안재홍이 업계 감독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충무로에서도 성품 좋기로 유명한 배우예요. 함께 작업해보니 정말 잘 맞았고요. 테이크를 많이 갔을 때 제가 어떤 장면을 선택하면, 안재홍 씨도 그걸 마음에 두고 있었다며 씩 웃더군요. 통통한 친구가 웃으니까 너무 귀엽고 기분이 좋더라고요. 사랑스럽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배우입니다.”
‘허재윤’ 역의 배우 김민도 눈에 띈다. 튀려 하지 않아도 튀는 그런 배우랄까. 장항준 감독은 처음 김민을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오디션장에 들어올 때부터 허재윤처럼 말하고 수줍게 웃더라고요. 또 연기를 아주 잘했고 신인만의 간절함도 있었죠. 게다가 노력까지 하니 정말 좋았어요. ‘얜 이 작품 아니더라도 언젠간 잘되겠다’ 싶었습니다. 실제로 작업해보니 인간성도 좋더군요. 전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과는 작업하긴 싫거든요.”
<리바운드>는 될 대로 되는 삶을 지향하는 장항준 감독의 피를 들끓게 한 작품이다. 뉴스를 통해 실화를 접한 후 바로 부산중앙고등학교를 찾아가 허락을 받았고, 대학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제작사 대표와 시나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직감에 의한 직진이었는데, 소위 대박의 향기가 감돌았기 때문이었다.
“제작사 대표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도 ‘이게 웬 떡인가’ 싶었어요.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도 ‘아빠가 안 하더라도 누군가 꼭 영화화했으면 좋을 작품’이라고 말했죠. 평소 타인의 조언을 귀담아듣지만 판단은 내가 하는 편이라 아내와 딸이 반대했다 해도 내 마음대로 했을 텐데 그렇게 말해주니 더욱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투자가 보장되더라도 피가 끓지 않으면 안 하는데 <리바운드>는 제 피를 끓게 한 작품이죠.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집중해 재미있게 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장항준 감독에 김은희 작가까지, 순항으로 보였던 <리바운드>는 사실 난항이었다. 투자 무산이 반복됐다. 투자자가 나타났다가도 결과적으로 투자로 이어지지 못하는 그야말로 난국이었다. <리바운드>가 5년 동안 표류했던 이유다.
“촬영하려고 모았던 스태프를 해산시켰습니다. 눈물을 머금었죠. 각자의 삶을 살고 있던 스태프를 다시 모을 수 있었던 건 넥슨에서 전액 투자를 결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장원석 대표가 영화를 최초로 기획했고, 김영훈 대표의 워크하우스컴퍼니가 공동 제작을 하기로 한 상황에서 배우 하정우 씨가 넥슨 쪽에 다리를 놔주었어요. 그 덕분에 전액 투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더욱 다행이었던 건 뿔뿔이 흩어졌던 스태프가 스케줄을 비워주었죠. 천신만고 끝에 <리바운드>가 탄생한 겁니다.”
아무도 관심 없는 이야기에 무한 관심을 쏟는 인물,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사실에 혼자서 의문을 던지는 인물,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지만 매번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인물. 현실에는 없을 것 같은 인물이 있다. 장항준 감독이 꼭 그렇다.
“저는 유행을 안 좋아합니다. 유행을 따라가려야 따라갈 수 없는 스타일이기도 하고요. 모두 자동차가 뒤집어지는 액션 영화를 찍을 때 저는 안전 주행하는 영화를 찍었습니다. 장르물이 없던 시절에 드라마 <싸인>을 만들었죠. 사람들은 저더러 청개구리라 하지만 저는 제가 좋아하는 걸 할 뿐입니다. 자신의 기호와 취향을 대중에게 선보이고, 그들로부터 공감을 얻는 것이 이 직업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의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할 수만 있다면 죽는 날까지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요.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천 가지의 직업 중 저의 가슴을 가장 뛰게 만드는 게 영화감독이거든요.”
저는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어요.
다만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낙천적’이라는 겁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런 댓글 많이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웃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알고 있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건 감사하게도 불러주기 때문이에요. 개인적으로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힘들고 부담스럽거든요. 한때 예능 작가였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것뿐이지 맘껏 즐기지는 못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뼛속까지 영화감독입니다.”
마치 결의에 찬 듯한 액션을 취하는 그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웃긴 영화감독’이라는 말이 꼭 맞아 보인다. 그렇게 싫은데도 꼬박꼬박 예능에 출연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지듯 물었다. 장항준 감독의 목소리가 커졌다.
“남의 영화도 아니고 제 영화잖아요. 신인 위주로 배우를 쓰니까 불러주는 방송국도 많지 않아 제가 몸으로 때우고 있어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예능으로 각광받는 때니까요.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못 웃기고 돌아오는 날엔 어깨가 처지더라고요. 제 할 일을 못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살다 보니 아내가 김은희 작가인 남자,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감독이라 평가받는 남자, 개그맨보다 웃긴 삶을 사는 남자.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다. 인생은 장항준처럼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저는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어요. 국어, 수학, 영어, 체육, 미술, 음악…. 골고루 다 못하는 아이였죠. 그랬던 제가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저도 의문일 때가 있습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낙천적이라는 겁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조바심 없는 저의 성격이 인생에 발전을 준 게 아닐까 싶어요. 저도 제가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겸손한 대답이다. 게다가 위트까지 있다. 분위기를 리드하는 말솜씨는 부러울 정도다.
“모자라 보여서 그런 것 아닐까요. 말끔하거나 근엄하고 스마트하진 않지만 제 감정을 사람들에게 다 얘기하거든요. 그런 지질한 면이 있죠. 그런데 그게 또 귀엽지 않나요? 그래서 사랑받는 것 같아요.”
장항준 감독은 진지한 이야기도 무겁지 않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다. 가벼운 이야기를 꽤나 점잖게 말하는 재주도 있다. 다정다감하고 친절하지만, 스스로에게만큼은 가장 엄격한 장항준 감독이 만든 작품은 사랑받아 마땅하다. <리바운드>도 그중 하나다.
“<리바운드>는 오늘의 실패를 딛고 계속 나아가야 하는 모든 이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작품입니다. ‘미련도 후회도 없이 오늘을 즐기자’, ‘농구가 끝나도 인생은 계속된다’와 같은 대사가 그걸 대변해주죠. 부산중앙고 선수들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승리를 거둔 이유는 그들이 그때 그 순간을 즐겼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이 ‘리바운드’하길 바랍니다.”
에디터 : 하은정 | 취재 : 곽희원(프리랜서) | 사진 제공 : 미디어랩시소·바른손이엔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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