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듯 공간을 읽다, 레어로우 하우스 [MZ 공간 트렌드]

2023. 5. 2.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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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 마련된 편집숍. 빨간 코비 쇼파와 레어로우 제품들의 컬러에서 영감을 받은 색색의 타월 등.



소설을 통해 타인의 세계를 상상한다. 학자들은 이를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개별적 경험이 공감의 과정으로 진화하고 깨달음의 순간으로 이끈다. 소설에는 인물·배경·사건이라는 3요소가 필요한데 이곳에도 있다. 레어로우 하우스다.

레어로우 하우스는 자체 제작 가구 브랜드 레어로우의 오프라인 숍이다. 레어로우라는 이름은 레어(rare : 드문)와 로(raw : 날것, 본질)를 합쳐 만들었다. 날것의 재료로 본질만 살려 결과물을 만든다는 의미다. 철제를 기반으로 가구를 자체 생산한다. 철제 하면 떠오르는 투박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빨간색·파란색·노란색 등 원색을 입히고 겉면을 매끈하게 만들거나 패브릭을 결합했다. 최중호 스튜디오·바이빅테이블 등 디자이너들과 협업하며 감각적인 철제 가구 브랜드로 성장하는 중이다.

레어로우하우스의 야외 테라스. 레어로우의 가구에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2022년 10월 성수동의 낡은 단독 주택을 레어로우 하우스로 탈바꿈시켰다. 이제는 기업들의 브랜딩과 캠페인을 위한 로케이션이 된 성수동이다. 공업사와 낡은 저층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촌스러운 느낌은 이제 사라진, MZ세대(밀레니얼+Z세대)들의 취향에 맞춘 오프라인 공간과 팝업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곳, 부동의 MZ세대 성지인 곳이다.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공간은 작업실과 조리실, 침실이다. 실생활이 가능할 듯하다.



레어로우 하우스는 주택의 구조·프레임·벽을 그대로 둬 거주지의 모양을 유지했다. 이곳에 ‘최성우’라는 인물이 있었다. 최성우는 가상의 인물이다. 레어로우는 최성우에게 서사를 부여했다. 그는 자유로운 성격을 지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맥시멀리스트다. 홈 파티를 즐기고 새 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은 싫어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향을 피우고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신다. 또 물컵과 음료수 컵을 구분하고 영수증을 모은다. 최성우라는 인물의 시선으로 그의 사소한 습관들을 반영해 공간을 구성했고 관람자들은 그가 머무른 공간에서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지금은 새로운 입주자를 맞이했다. 레어로우가 추구하는 방향과 부합하는 뮤즈를 찾았다. 레어로우는 인터뷰를 통해 뮤즈가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을 탐색하고 그가 지냈을 법한 레어로우의 공간을 만들었다. 재밌는 것은 뮤즈가 실제 뮤지션이라는 것(하지만 일정 기간 뮤지션이 누군지 공개하지 않았다), 그의 취향과 집에 대한 로망을 담은 텍스트를 팸플릿으로 만들어 제공한다는 점이다.

러프한 평면도. 공간마다 적힌 텍스트를 읽으면 뮤즈의 취향과 습관을 엿볼 수 있다.



누군가 이곳에 머문 듯이 연출된 오브제

1층에는 누구나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는 립밤·핸드크림·컵·수건 등의 소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가볍게 둘러본 뒤 모퉁이에 있는 2층 계단을 오른다. 오른쪽 벽에는 팸플릿이 꽂혀 있다. 팸플릿에 적힌 ‘더 필요한 게 없는 세계’, 뮤즈가 집에 대해 정의한 구절이다. 손으로 간단히 그린 듯한 평면도와 뮤즈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공간 소개들이 담겨 있다. 팸플릿을 꼼꼼히 읽어 본다. 뮤즈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공간은 6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작업실이다. 일반 주거지라면 거실인 곳을 작업실로 구성했다. 벽에 걸린 철제 선반에는 악보, 앰프, 마이크 선, 음악 작업을 상징하는 오브제들이 있다. 작업실 옆에는 작은 조리대가 있는데 간편한 도시락에 풍미를 더할 수 있는 올리브오일이나 트러플오일을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정도다. 그다음은 침실이다. 침대는 방 한가운데 대각선으로 놓여 있다. 정리되지 않은 침구가 이곳의 주인이 이제 막 일어난 듯한 인상이다.

정돈되지 않은 침구. 아무일이 없는 내일을 상상하며 밤을 만끽하는 뮤즈, 그를 상상하는 우리.



페르소나의 눈으로 공간을 읽다

팸플릿을 읽으면 뮤즈의 취향과 습관을 알 수 있다. 뮤즈는 섬 한가운데 있는 듯한 고요함을 느끼고 싶어 침대를 대각선으로 배치했다. 스트레칭과 요가를 하는 릴랙스 룸, 화장실, 음악 감상실, 차를 마시는 야외공간까지 한 사람의 내밀하고 사적인 생각을 엿본다.

이곳에서 뮤즈를 떠올릴 수 있는 힌트들은 ‘엉켜 있는 마이크 선, 이불 밑의 맨발, 이름없는 CD, 블랙커피, 아로마 오일, 양방향 슬리퍼’다. 뮤즈는 커피는 드립으로 내려 마시지만 작업실에서는 무난한 캡슐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을 들어갈 때마다 ‘욕실화의 앞뒤가 없으면 어떨까’라고 생각한다. 잠들기 전까지 휴대전화를 보다가 결국 소설책을 읽는 그, 미니멀한 형태의 수납장 포 스태킹 쉘브에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같은 판타지 책들을 두었다. 우리는 그의 습관을, 취향을 읽고 이곳에서 작업할 때 그의 마음 같은 것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팸플릿에 적힌 힌트를 읽고 공간 속 디테일에 재밌어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서른 걸음이면 둘러볼 수 있을 듯한 이곳에 30분, 1시간이 다 되도록 있다.

이제는 공개된 레어로우 하우스의 둘째 입주자, 뮤즈는 선우정아다. 그의 전시 공간은 3월 18일부터 6월 18일까지 이어진다. 방문 후 인스타그램에 후기를 남긴 뒤 재방문해 카운터 직원에게 보여주면 포토 부스에서 촬영할 수 있는 코인도 준다.

뮤즈가 즐겨 마시는 에스프레소. 악보에는 연필로 메모한 자국이다.


1층에서는 머그잔, 향수, 룸스프레이, 화분 등 직접 큐레이팅한 브랜드 제품들을 선보인다.


윤제나 기자 ze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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