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방국 도청 가능하게 만든 미국의 대외정보감시법, 과연 폐지할까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2023. 5. 2.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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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군 현역 사병이 정부의 1급 기밀문서 100여 건을 유출했다. 미국 정부가 우방국을 도청한 흔적이 이 기밀에서 발견되었다. 도감청을 가능하게 한 해외정보감시법이 논란이 되고 있다.
미국 정부의 1급 기밀문서를 유출한 잭 테세이라가 4월13일(현지 시각) FBI 요원들에게 체포되고 있다.ⓒREUTERS

최근 한 미국 공군 현역 사병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미국 정부의 1급 기밀 100여 건을 유출해 관련 당국에 충격을 던졌다. 우방에 대해서도 미국 정부가 도감청을 해온 흔적이 이 기밀에서 발견돼 파문이 일고 있다.

기밀 유출의 장본인은 미국 매사추세츠주 방위군 정보부대 소속 잭 테세이라(21) 일병이다. 하급 사병임에도 1급 비밀(top secret) 인가를 받은 테세이라는 지난해 12월부터 최근까지 온라인 메신저 프로그램 ‘디스코드’ 비공개 채팅방에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관한 기밀은 물론 우방국의 내밀한 동향까지 도감청한 내용 등을 유출했다. 그는 기밀 미승인 보유 및 전송 등 혐의를 받고 있다. 유죄가 확정되면 중형이 불가피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국가안보보장회의, 북한의 무기 프로그램, 우크라이나에 대한 유엔의 토론, 러시아 군 동향과 사설 용병 계약자 와그너그룹, 이스라엘 정보 조직 모사드, 그 밖에 이란·콜롬비아·니카라과·아이보리코스트(코트디부아르) 등 미국이 도청(eavesdropping)을 통해 획득한 정보가 놀랄 정도로 광범위하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한국과 관련한 기밀이 눈길을 끈다. 미국이 한국에 요청한 포탄 제공과 관련해 이문희 전 외교안보비서관과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 간의 민감한 대화 내용까지 포함돼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우리에게 도감청을 했다고 확정할 만한 단서가 없다”라며 문건 자체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미국 내 반응은 다르다. CNN은 국방부 고위 관리의 말을 인용해 “유출된 기밀은 대부분 사실인 것 같다”라고 전했다.

미국은 2013년 6월 당시 국방정보국(DIA) 계약직 컴퓨터 기술자로 일하던 스노든의 폭로로 우방국 지도자들의 통화 내용과 이메일이 도청당한 사실이 드러나자 엄청난 외교적 곤욕을 치렀다. 독일 베를린에선 수천 명이 항의 시위를 벌였고 독일 주재 미국 중앙정보국(CIA) 지부장이 추방됐다. 자크 시라크를 비롯해 역대 대통령 3명이 도청당한 프랑스에서는 주프랑스 미국 대사가 소환돼 공식 항의를 받았다. 자신의 전화와 이메일을 도청당한 지우마 호세프 당시 브라질 대통령은 예정된 미국 방문을 취소했다. 우방과의 외교적 마찰이 심해지자 결국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2014년 1월 (‘명백한 국가안보 목적’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우방국 지도자에 대한 도청을 금지시켰다. 이번 기밀 누출 건에선 우방 지도자에 대한 도청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국은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미국 고위 관리들, 세계 지도자들과 나누었던 대화도 도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테세이라의 기밀문서 유출 충격파는 스노든에 비하면 약한 편이다. 무려 7000건 이상의 기밀을 영국 〈가디언〉과 미국 〈워싱턴포스트〉 등 유력 매체에 흘렸던 스노든 폭로에 비하면 기밀의 유출 범위나 대상이 적기 때문이다. 테세이라는 자신이 개설한 비공개 채팅방 ‘서그 셰이커 센트럴(Thug Shaker Central)’에 기밀 100여 건을 흘렸고, 그 대상도 채팅방에 초대한 10대 청소년 20~30명에 국한됐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우방국의 동향을 파악한 것까지 포함돼 해당 국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에 누출된 기밀문서는 이집트, 한국, 우크라이나 및 아랍에미리트(UAE)를 포함한 우방국의 심장부까지 미국 첩보기관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침투했는지 다시 한번 보여줬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외교적 충돌을 감수하면서도 우방국을 도감청할 수 있는 건 해외정보감시법(FISA) 제702조 덕분이다. 2001년 9·11 테러가 터진 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법원의 수색영장 없이도 테러 용의범들을 도감청할 수 있도록 ‘스텔러윈드(Stellawind)’란 비밀 프로그램을 승인했다. 미국 의회가 2008년 이를 FISA의 부속 조항으로 삽입해 만든 게 702조다. 이 조항에 따라 미국의 정보기관, 특히 국방부 산하 감청 전담기관인 국가안보국은 구글이나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애플처럼 미국 기업에 제공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외국인의 이메일, 전화 통신 기록 등을 수집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미국 정보기관은 국가안보에 위해가 되는 해외 테러리스트, 대량무기 확산자, 컴퓨터 해커 등의 동향을 파악하겠다는 것이다. 첩보 위성을 관할하는 국가정찰국(NRO)의 감청 정보도 빼놓을 수 없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대통령에게 매일 아침 보고되는 정보 가운데 60% 이상이 감청 정보에 기반한다”라고 보도했다. 그만큼 미국 정부 수뇌부가 도감청과 같은 ‘시긴트(SIGINT:Signal Intelligence)’, 즉 신호정보를 신뢰한다는 뜻이다.

미국 국가안보국(NSA) 건물. 2013년 NSA 계약직 컴퓨터 기술자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미국이 우방국 지도자들의 통화 내용과 이메일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AP Photo

미국인의 사생활 침해 가능성에만 주목

우방에 대한 도감청을 근절할 방법은 없을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702조를 폐지하는 것이지만 이는 쉽지가 않다. 지난 2월 하순 바이든 행정부는 올해 연말 만료되는 702조의 시효를 재연장해줄 것을 요청했다. 메릭 갈런드 법무장관과 애브릴 헤인스 국가정보국장은 의회에 보낸 공동서한에서 “미국과 미국인 및 동맹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 702조를 이용해 습득한 정보가 핵심 역할을 해왔다. 감청 정보의 신속성·신뢰성·구체성 등에서 702조를 대체할 방법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702조의 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지난해 7월 미국 CIA가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 지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를 추적해 살해한 점을 꼽았다.

미국 의회는 5년 시효인 이 조항을 FISA에 삽입한 뒤 두 차례 연장했다. 이번에는 어떨까.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702조가 정적을 도청하는 데 남용됐다며 벼르고 있다. 702조는 NSA 등 감청 기관이 첩보 대상의 외국인과 접촉한 미국인의 이메일이나 전화 통화 내역을 영장 없이 수집할 수 있고, 그렇게 수집한 정보를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수사 목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간 사생활 침해 논란을 빚어왔다. 2018년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측근에게 적용되면서 정치적 파장을 불러오기도 했다. 미국 FBI는 2016년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을 수사하면서 702조를 이용해 당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외교자문관을 지낸 카터 페이지의 전화를 도청했다. 법무부가 FBI의 도청 행위 가운데 일부 잘못을 시인했다. 그러자 공화당의 트럼프 우군들이 반발하면서 702조 개정·폐지를 들고나왔다. 최근 짐 조던 하원 법사위원회 위원장은 폭스뉴스에 “문제의 조항을 더 이상 연장해선 안 된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공화당 의원들이 702조에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조항이 미국인의 사생활을 좀 더 보호하는 쪽으로 개정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폐기될 가능성은 없다는 게 지배적 관측이다. 미국인의 사생활 침해 문제에 주목할 뿐, 해외의 첩보 문제를 거론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702조가 아예 폐기되지 않는 한 우방에 대한 미국의 도감청에는 종전처럼 별 영향이 없으리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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