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두뇌가 뛴다]⑫ 학위 대신 1조원 회사 일군 영재학교 출신 창업가 “사업도 연구도 문제 푸는 과정”
과학영재학교 1기 출신… 연구 대신 창업 뛰어들어
창업 7년 만에 기업가치 1조원 넘어서
“다양한 사람 만나며 시야를 넓혀라”
한국계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린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는 1983년생이다. 나이를 따지는 한국 사회에서 1980년대생은 아직 젊은 실무진 축에 속하지만, 과학계에선 위상이 남다르다.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는 연구자의 역량과 아이디어가 빛나는 시기로 불린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들이 자신의 핵심 연구를 처음 시작한 평균 연령이 37.9세로 나타났다. 조선비즈는 한국의 기초 과학과 공학을 이끌 차세대 리더들을 독자들께 소개하는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한다. 젊은 과학자들은 한국공학한림원과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추천을 받아 선정했다. ‘제2의 허준이’를 넘어서 한국의 첫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 그리고 한국 산업의 미래를 이끌어갈 핵심 인재가 이들에게서 나오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2016년에 창업한 한국신용데이터(KCD)는 소상공인이 가게 매출과 비용을 관리할 수 있는 캐시노트 서비스를 통해 빠르게 성장했다. 전국 200만 소상공인 중 130만 곳이 캐시노트를 사용한다. 작년 10월 LG유플러스와 파이서브로부터 투자를 유치할 때 1조1000억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으며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에 올랐다. 2025년 상장을 준비하고 있고, 소상공인 특화 은행 설립도 검토하고 있다.
불과 7년 만에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트업이 된 KCD의 창업자는 연세대에서 산업공학과를 나온 김동호 대표다. 1987년생인 김 대표는 아직 30대의 나이지만 이미 두 차례 스타트업을 창업한 연쇄 창업가이기도 하다. 김 대표는 연세대에 재학 중이던 2011년에 모바일 조사 서비스 기업인 오픈서베이(아이디인큐)를 창업했고, 2016년에 KCD를 창업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연쇄 창업가인 김 대표는 부산의 과학영재학교 1기 출신이다. 과학영재학교 출신은 보통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거쳐 연구자가 되거나 의사의 길을 걷는 경우가 많다. 해외에선 공학도가 사업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에선 과학영재가 1조원 가치의 스타트업 창업가가 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김 대표는 어떻게 창업의 꿈을 키운 걸까. 그리고 어떻게 1조원의 기업을 키워낸 걸까. 지난 4월 17일 서울 서초구 KCD 사무실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언제부터 창업에 관심을 가졌나. 소위 말하는 ‘과학영재’인데.
“대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취업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미국 실리콘밸리로 교환학생을 가면서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가 됐다. 산호세 주립대로 교환학생을 갔는데 실리콘밸리 한 가운데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 가보니 모두가 창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에선 창업에 대해 막연하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돈과 네트워크, 아이템이 모두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미국에선 창업이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다. 그 때까지는 인생의 경로에 대해 360도 가운데 5도밖에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실리콘밸리에서 시야를 더 넓히게 됐다.”
-병역특례를 금융회사에서 했다. 이것도 과학영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와이즈에프엔이라는 회사에서 데이터 마이닝을 했다. 인덱스 펀드의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일이었는데, 퍼블릭 데이터를 기초로 투자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운영 수수료를 받는 방식이었다. 와이즈에프엔을 선택한 건 이유가 있다. 금융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취업을 하든 창업을 하든 금융을 아는 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이디인큐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어떤 아이템이었나.
“확실한 아이템을 정하지도 않고 창업을 했다. 아이폰이 나오고 모바일 벤처 붐이 불면서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파도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아이디인큐라는 회사 이름은 ‘아이디어 인큐베이터’의 줄임말이다. 그러다 오픈서베이라는 모바일 조사 서비스를 생각하게 됐다.”
-모바일 조사 서비스를 떠올린 계기가 있을까.
“10년에 한 번씩 새로운 파도가 온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에 컴퓨터가 등장했고, 2000년대에 초고속인터넷이 세상을 바꿨다. 2009년에 아이폰이 출시되는 걸 보고 모바일이라는 파도가 온다고 느꼈다. 사실 비즈니스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음료수를 파는 건 결국 유통업이다. 이걸 동네마트에서 팔다가 편의점으로 바뀌고, 모바일로 이동할 뿐이다. 고객 입장에서 음료수를 손에 쥔다는 밸류(가치) 자체는 다를 게 없다. 미디엄(수단)이 달라질 뿐이다. 이 변화에서 기회가 열린다. 사회조사를 보면 대면에서 전화, 우편, 인터넷 등으로 변했다. 이용자에게 뭔가를 물어보고 답변을 정리하는 건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이 보급되면 모바일 조사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시작하게 된 거다.”
-어떻게 보면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창업한 게 아닌가. 시행착오도 많았을 것 같다.
“그렇다. 병역특례가 끝나고 취업도 없이 바로 창업했으니 시행착오도 당연했다. 돌아보면 운이 좋은 부분도 많았다. 당시 모바일 산업이 태동하던 시기라 실수를 해도 버틸 수 있었다. 썰물일 때는 배가 암초에 부딪히지만, 밀물 일때는 조금 방향을 잘못 잡아도 괜찮은 것과 다르지 않다. 산업이 성장하고 인재의 유입이 많을 때는 실수가 묻힌다.”
-창업하기 좋은 때가 있나.
“그 질문은 지금이 주식투자하기 좋은 때냐는 질문과 같다. 기가 막히게 저점을 찾아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시장의 저점과 고점을 맞추는 건 불가능하다. 리스크 범위를 특정해야 한다.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리스크의 수준이 다르다. 감당할 수 있는 리스크의 범위를 정해놓고 그 범위 안에서는 언제든지 창업을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풀어야 할 문제가 보인다면 창업을 하면 된다.”
-과학영재학교를 나오고 공대를 다녔다. 전형적인 공학도인 셈인데 사업이 어렵지는 않았나.
“본질적으로 연구를 통해 문제를 푸는 것과 사업을 통해 문제를 푸는 건 같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사고라는 게 가설을 설정하고, 이를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고안하고, 실험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반복하면서 데이터를 쌓아가는 것이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고객이 누구인지를 질문하고 답을 명확히 내리는 게 중요하다. 연구를 통해 플라스틱을 만드는 것도 인류를 위한 길이고, 그런 플라스틱을 값싸고 질 좋게 만들어서 파는 것도 인류를 위한 길이다.
연구라는 건 좁게는 수십 년, 넓게는 수백 년의 필드에서 1㎜ 정도의 새로운 발견을 쌓아가는 작업이다. 새로운 걸 찾기 보다는 기존의 것을 조금씩 응용해서 변화를 주는 게 연구의 대부분이다. 2018년에 노벨상을 받은 광학집게 기술은 사실 1990년대 후반에 나온 것이다. 이걸 조금씩 바꾸기만 해도 노벨상을 받는다. 사업도 같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같은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건 쉽지 않다. 스스로 관심있는 분야를 정하고 고객이 누군인지 고민해야 한다. 새로운 뭔가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고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오래된 기술이 오히려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사업과 연구가 다른 점은 없나.
“사업은 불확실성이 크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가 많고 영향을 미치기도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금리 수준을 내가 결정할 수는 없지 않나. 반면에 연구는 불확실성이 상대적으로 적다. 실험을 할 때도 내가 세팅을 선택하면 된다. 이런 불확실성이 불편한 사람은 사업에 맞지 않겠지만, 성향이 맞다면 사업도 좋은 선택지가 될 것 같다.”
-과학영재학교의 경험이 사업에 도움이 됐나.
“물론이다. 과학영재학교는 고등학교지만 학생이 수강신청을 해서 자신의 커리큘럼을 능동적으로 짤 수 있었다. 일반 고등학교였다면 주어진 것만 해야 할 텐데, 과학영재학교에선 자유도가 높은 교육 환경을 제공해줬다. 사실 과학영재학교를 다니면 큰 문제가 없는 한 제도적으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입학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보니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능동적으로 도전하는 자세를 갖게 된 것 같다. 과학영재학교 1기였는데 동기 144명 중에 나처럼 창업을 했거나 창업 기업의 초기 멤버로 간 사람이 10% 정도 된다. 제법 높은 비율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생활은 어땠나. KAIST를 가지 않고 연세대학교를 택한 것도 의외다.
“과학영재학교를 나오면 대부분 KAIST를 간다. 144명의 동기 중 110명 정도가 KAIST를 갔다. 그렇게 되면 계속해서 같은 사람들, 비슷한 인생 경로를 밟아 온 사람들과 함께 있는 셈이다. 연구자가 되고 IF가 높은 논문을 쓰려고 하고 유학을 준비하고, 모두가 이 과정을 똑같이 밟는다. 나는 거리를 두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양한 사람과 교류해보는 일이다. 연세대는 종합대학이기 때문에 다양한 전공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연세대에 가서도 공과대학보다는 중앙동아리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학술동아리인 ‘JSC’라는 곳에서 활동하면서 철학이나 인문학 고전을 살면서 처음 읽었다.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플라톤이나 사르트르의 책을 1년 동안 읽었는데, KAIST를 갔다면 하지 않았을 고민과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였다.”
-한국공학한림원의 차세대 리더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마찬가지다. 차세대 리더 프로그램은 전국에서 30개 대학이 참여한다. 같은 공학도를 만날 거면 이렇게 다른 학교에서 모인 사람을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전공이 다른 사람, 대학이 다른 사람처럼 나와 뭔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해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최근에는 많은 이공계 학생이 ‘의사’만을 바라보지 않나. 다른 선택지가 오히려 줄어든 느낌이다.
“특정 직군에 인재가 몰리는 건 ROI(투자자본수익률)가 높다는 기대 때문이다. 이건 단기적으론 안 변하지만, 결국 중장기적으로는 변하기 마련이다. 삼성이 반도체에 투자하던 1980년대 후반에는 공부 잘하는 이공계가 다 전기전자공학과를 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다른 선택지의 사회적인 기대치를 높여주면 된다.
고등학교나 10대 때부터 다양한 인생의 선택지에 대해 알려주는 것도 필요하다. 진로선택이라는 걸 대학교 전공 고르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고민의 출발점이 대학이 되는 순간 생각과 고민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김동호 한국신용데이터 대표는
2006년 연세대학교 산업공학과 학사
2011년 아이디인큐(오픈서베이) 창업
2016년 한국신용데이터 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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