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거짓말이 어느새 능력이 된 사회
신뢰 무너진 공동체 오래 못가, 법원은 사기죄에 더 분노해야
일선 경찰들이 가장 ‘무식한’ 범죄로 꼽는 게 택시강도다. 시작은 돈 좀 훔치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을지라도 기사를 위협하는 과정에서 무력이나 흉기 사용은 필연적이다. 몸싸움을 하다 보면 상해나 살인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그렇게 해서 얻는 건 고작 몇만 원이다. 은행 앞에서 기다리다 수백만 원 돈봉투를 덮친 소매치기범에 비하면 죄는 무겁고 수익(?)은 턱없이 낮다. “범죄도 머리가 좋아야 된다”는 말이 우스개만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세사기는 ‘저위험 고수익’의 전형이다. 대출로 빌라나 오피스텔을 신축하거나 매입한 다음 세입자를 모집한다. 이들의 전세보증금을 종잣돈 삼아 수십, 수백 채를 더 사들인다. 내돈 한푼 안 들이고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가 되고, 막대한 임대수익을 올리는 것이다. 경기 안산에서 ‘빌라의 신’으로 통하던 40대 일당이 이런 방식으로 돌려 막기 한 빌라는 무려 3000채가 넘는다. 하지만 1심에서 받은 형량은 징역 5~8년이다. 그나마 검찰 구형량보다 늘어난 게 이 정도다. 수원의 60대는 세입자 400여 명에게서 보증금 250여억 원을 가로챘는데 1심에서 징역 9년이 나왔다. 비싼 변호사를 동원하면 2심 형량은 더 줄어들 게 뻔하다. 재판을 봐야겠지만 임차인 3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천 건축왕이나 부산 오피스텔왕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기죄는 법정형이 낮은데다 가중처벌 규정이 있어도 한계가 뚜렷하다. 10년형에 5년을 더해봤자 15년이 최고다. 피해자가 7만여 명, 피해액은 5조 원 가까웠던 조희팔 사건에서 공범들이 받은 죗값은 징역 1~10년에 그쳤고,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도 있었다. 자살한 피해자만 수십 명인데도 결론은 이리 허무하다. 미국에선 최고형 자체가 높고 개별 범죄 형량을 합산하기 때문에 수백년형 선고가 낯설지 않다. 원망과 자책으로 시름시름 말라가는 사기 피해자들의 고통은 대를 이어 내림하기 일쑤인데, 정작 범죄자들은 교도소에서 몇년 썩다 나와 은닉해둔 자산으로 떵떵거리고 산다. 경제범죄나 사기가 다른 범죄에 비해 재범률이 유독 높은 이유다.
온갖 사기에 이골 난 국민이지만 이번 전세사기에 더 분노하는 건 가해자가 우리 곁에 있는 보통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공인중개사는 중개물의 권리관계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고 그것을 설명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악질 사기범의 손발이 되어 깡통전세 위험을 알면서도 세입자를 속였다. 신혼 부부, 사회 초년생, 취업 준비생, 카페 주인이 그렇게 당했다. 설마 사람이 목숨을 버릴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앞에서 계약서 도장을 찍는 이들이 몇 달 안 가 살던 집에서 쫓겨날 수 있는 개연성은 인식했을 게 분명하다. 눈 앞의 이익에 양심도, 최소한의 직업 윤리도 내팽개친 것이다.
공자는 나라를 지키는 3대 요소로 병(兵) 식(食) 신(信)을 꼽았다. 이중에 버려야 할 게 있다면 맨 처음이 ‘병’(군사력)이고 다음은 ‘식’(경제력)이라고 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끌어 안고 있어야 할 가치는 ‘신’(믿음)이었다. 그게 없으면 공동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진부할 만큼 많이 인용된 2500년 전 고대 사상가의 말이 적확하게 조응되는 우리 현실이 기막히다. 새빨간 거짓말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해대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다. ‘저 정도 인사가 거짓말 할까’ 하는 선량한 믿음을 여지없이 배신하는 일이 전세사기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온·오프라인에서 넘쳐나는 가짜뉴스가 그 단면이고, ‘거짓말 면허’라도 가진 듯 예사로 거짓 선동을 해대는 정치인들이 그 증거다. 도의도 염치도 없는 사람들이 거짓을 발판 삼아 명성을 얻고 승승장구하니 평범한 국민마저 여간해선 죄책감을 못 느낀다. 부동산 임대차 시장 왜곡의 근본 원인은 정부 정책의 패착이지만 우리가 더 좌절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지난해 말 대검찰청이 펴낸 보고서를 보면 10년 전과 비교해 절도 강도 살인 등 대부분의 범죄가 줄었는데 성범죄와 함께 사기만 늘었다. 거짓말 폐수가 온 사회를 휘감아 돌게 된 데는 가해자에게 관대한 법원 책임도 있다. 어떤 이에게 1억 원은 명품백 하나 값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목숨이다. 제 부모 형제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기범이 그렇게 챙긴 돈으로 떠르르한 변호사나 로펌의 조력을 받아 솜방망이 처벌을 받을 때 유족의 피눈물은 누가 씻어주겠는가. 이제는 사기 형량 강화를 전향적으로 검토할 때가 됐다. 피해자 규모와 지위, 피해 액수, 사회적 파장을 좀 더 엄정하게 따져야 한다. 거짓과 위선이 능력으로 치부되는 사회가 온존하게 유지된다면 그게 기적일 것이다. ‘검사는 정의의 편, 판사는 진실의 편’이라는 법언이 있다. 진실을 허무는 거짓에 법원이 더 분노해야 한다.
강필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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