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붉은 악령’, 한국을 축구로 물들이다

김민기 기자 2023. 5. 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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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경기]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 4강 신화

오는 20일 아르헨티나에서 열리는 2023 FIFA(국제축구연맹) U-20(20세 이하) 월드컵에 나서는 한국 대표팀은 파주 NFC(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에서 마지막 담금질 중이다. 목표는 16강. 하지만 한국은 4년 전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그보다 훨씬 전 4강에도 오른 바 있다. 선배들 성과는 어린 선수들에게 동기 부여가 되는 법이다.

폴란드와 3·4위 결정전 - 1983년 한국 U-19(19세 이하) 축구 대표팀이 FIFA(국제축구연맹) 주관 세계청소년선수권에서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빨간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한국 선수들을 보고 외신들은 ‘붉은 악령’이라 불렀는데, 이는 현재 대표팀 서포터스 ‘붉은 악마’의 유래다. 사진은 한국과 폴란드의 3·4위 결정전 경기 모습. /대한축구협회

40년 전 한국 축구가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1983년 6월 멕시코에서 열린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현 U-20 월드컵). ‘붉은 악마’(당시엔 붉은 악령·Red Furies)란 찬사를 받으며 4강까지 질주한 전설적인 얘기다.

출전부터 극적이었다. 원래는 중국과 북한에 밀려 아시아 동부 지역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런데 북한이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을 폭행, 2년간 국제 대회 출전 금지 징계를 받았다. 그러자 3위인 한국에 기회가 돌아갔고 한국은 아시아 최종예선을 다시 거쳐 출전권을 따냈다. 지금은 (만) 20세 이하가 나가지만 당시는 19세 이하였다. 그야말로 진짜 ‘청소년’ 대회였다. 한국은 아시아에선 강호로 통했지만 월드컵에도 1954년 이후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 그런 나라가 세계 강호들을 연달아 꺾으며 4강 위업을 달성했다.

그 여정은 2019년 U-20 월드컵(한국 준우승) ‘데자뷔’였다. 첫 경기(1983년 스코틀랜드전 0대2, 2019년 포르투갈전 0대1)를 내주고 이후 승승장구했다. 개최국 멕시코와 호주를 연달아 잡으며 조 2위로 8강에 올라 우루과이와 연장 혈투 끝에 신연호(59·당시 고려대) 현 고려대 감독이 2골을 넣으며 2대1로 이겨 4강 진출에 성공했다. 연장 결승골은 신연호 슈팅이 상대 수비에 맞고 굴절되는 행운도 따랐다. 4강에선 둥가와 베베투가 뛴 최강 브라질(대회 우승)과 맞붙어 김종부(58·전 중국 허베이FC 감독)가 선제골을 넣고도 1대2로 역전패, 아쉽게 물러섰다. 하지만 예선에서 한국에 져 8강이 좌절된 홈팀 멕시코 관중마저 이 이역만리 청년들 투지에 매료됐다. 신연호는 “멕시코인들은 우리 선수단 버스를 에워싸 환호했고 훈련장·경기장을 찾아왔다.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줬고 ‘옷에 사인해 달라’고 요청했다”며 “말은 정확히 통하지 않았지만 죽기 살기로 뛰는 우리 모습에 감동을 받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잘 알려진 대로 박종환(87·당시 서울시청) 감독은 선수들을 혹독하게 다뤘다. 해발 2000m가 넘는 멕시코 고지(高地)에서 대회가 열린다는 점을 고려해 한국에서 훈련할 때 면 마스크를 착용하고 400m 트랙을 20바퀴 이상 달리게 했다. 산소 부족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마스크가 땀에 젖어 호흡은 거칠어졌지만 박 감독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 성과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건 아닐지라도 선수들 정신 무장을 시키기엔 충분했다. 엄격한 규율과 체벌도 병행했다. 이기근(58·당시 한양대) 전 이기근FC 감독은 “박 감독님 눈빛만 봐도 무서웠다. 스승 그림자도 감히 밟지 못하던 시대라 모두 묵묵히 훈련을 따랐다”고 말했다.

현지에 가선 강온(强穩)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 실수를 해도 화를 내기보단 실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기다려줬다 한다. 8강전에서 노인우(60·당시 고려대)가 전반 어렵게 얻은 선제 페널티킥 기회를 날려버렸을 때도 따로 질책하지 않았다. 원래 키커는 신연호였는데 노인우가 “내가 차보겠다”면서 공을 가져갔다는데도 그랬다. 박 감독은 현지에서 채소를 구해 직접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끓여주면서 선수들 입맛을 달랬다. 그러다 3·4위전에서 1대2로 패하자 당시 수문장이던 김풍주(59·당시 대우 로얄즈)에게 역정을 냈다. 이기근은 “물병을 차고 고성을 지르셨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너무 무서웠다. 당시 우리가 3위에 오르면 모두 강남 30평대 아파트를 한 채씩 받는다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4강 브라질전 시청률은 약 83%.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한국 축구 시청률 조사치(2위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 79%) 중 최고다.

1983년 카퍼레이드 중인 당시 박종환 감독(위 사진 왼쪽), 원흥재 코치(오른쪽). 고려대 4인방(아래 사진)은 총장으로부터 금목걸이를 받았다. 왼쪽부터 김종부, 김판근, 신연호, 노인우. /대한축구협회·신연호 고려대 감독

축구 세계 4강이란 기적을 쟁취하고 귀국한 청소년 축구 대표 선수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때는 흔했던 시내 카퍼레이드는 물론, ‘축구광’이던 전두환 대통령이 청와대로 초청해 선수들을 치하했다. 김포공항부터 광화문까지 선수·지도자가 3명씩 나눠 타고 태극기와 풍선을 흔들거나 나팔을 부는 수십만 시민에게 손을 흔들었다. 선수들은 “광화문까지 그 먼 거리를 가는데 연도에 시민들이 꽉 차 있었다”고 회고했다. 전 대통령은 선수단 전원에게 격려금 100만원을 금일봉으로 전달했다. 전 대통령은 “앞으로 올림픽 같은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자”고 말했다. 신연호는 “(대통령 외에도) 고려대 총장님이 금 목걸이, 전남도지사(당시 김창식 전 교통부 장관·신연호 고향이 전남 여수)님도 금일봉을 주시는 등 총 500만원 정도를 보너스로 받았다”고 전했다. 대기업 신입 사원 월급이 20만~30만원이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지나 호랑이 박 감독은 구순(九旬)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경기 양주시 한 요양원에 들어가 있는데 후배들이 1달에 1번쯤 찾아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한다. 가족들 왕래도 거의 없고 간혹 사람을 못 알아볼 때가 있어 제자들은 애가 탄다.

1983년 4강 신화 주역들은 18명. 신연호는 “18명 중 연락하며 지내는 이는 2~3명으로 손에 꼽을 정도. 어떻게 지내는지, 혹시나 힘들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고려대 83학번 동기인 신연호·김종부는 엄청난 주목을 받았으나 프로에선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김종부는 작년까지 중국에 머물렀으나 최근 한국에 돌아왔다. 18명 중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이는 김종부, 유병옥(59·이상 1986 멕시코), 김판근(57·1994 미국)뿐이다. 4명은 프로 무대도 밟지 못했고, 종적을 감춘 이들도 상당수다. 고향에서 초등학생, 중학생을 가르친다는 말만 전해진다고 한다. 남자 A매치(국가대표 대항전) 역대 최연소(17세 241일) 출전 기록을 갖고 있는 김판근은 2001년 은퇴 이후 곧바로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지금은 건설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이기근은 “2002 월드컵 멤버들은 꾸준히 만나고 서로에게 도움도 되지만, 우리는 다들 각자 일이 바빠 정기적으로 모이지 못했다. 언젠가는 다시 모일 날이 오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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