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巨野 전횡 막아야” vs “대통령 거부권은 독선” 악순환[인사이드&인사이트]
강성지지층 의식 野입법 독주에 정치협상력 부재 與거부권 건의만
역대 대통령 거부권 점차 줄어들다… 여야 협치 실종 속 다시 증가 우려
여야, 양보 없는 대치 속 정쟁만… 민생 법안 외면 국민들만 피해
●野 “대통령 독선” vs 與 “거야의 전횡”
여야가 ‘거부권 정국’에 대한 여론 비판에도 벼랑 끝 대치를 무릅쓰는 건, 결국 양쪽 모두 ‘실보다 득이 큰 장사’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이 잇달아 거부권을 행사하는 모습을 부각해 윤 대통령의 ‘독선’ 이미지를 강조하겠다는 전략이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민주당은 민생을 위해 할 일을 하려고 하는데, 대통령이 잇달아 이를 가로막는 모습으로 비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진 원내대변인은 지난달 27일 본회의에서 간호법 제정안이 통과되고, ‘대장동 50억 클럽’ 및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연루 의혹’ 관련 특별검사(특검)법 등 양 특검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되자 논평을 내고 “국민의힘은 더는 ‘대통령 거부권 건의’라는 무책임으로 국민을 기만하지 말길 바란다”고 했다.
민주당이 이처럼 법안 처리 강행을 이어가는 데에는 “기껏 다수 의석을 만들어 줬는데, 그깟 법 하나 통과 못 시키느냐”는 강성 지지층의 불만을 달래려는 포석도 깔려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집토끼’부터 지키겠다는 것. 민주당 지도부 소속의 한 의원은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 때 민주당이 패배한 이유 중엔 다수당인데도 국회에서 입법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지지자들의 불만도 반영됐다고 보고 있다”며 “이재명 대표와 지도부는 ‘우리 당에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국민이 원하는 일을 밀어붙이겠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이에 맞서 국민의힘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거부권 행사를 요구해서 민주당의 ‘입법 독주’ 프레임을 강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국민의힘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통해 ‘민주당이 어차피 공포되지 못할 걸 알면서도 무책임하게 법만 무더기로 통과시킨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윤희석 대변인은 지난달 본회의 직후 낸 논평에서 “입만 열면 ‘협치’ 타령이면서도 정작 쟁점 법안은 꼼수, 반칙으로 밀어붙이는 거야의 전횡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강민국 수석대변인도 “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볼모로 의회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전·현직 대표 사법 리스크에 대한 관심을 돌려보려 하고 있음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정치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야당에 끌려다니면서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는 집권여당의 무능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극단 수단에 기대는 정쟁 속 민생 외면
전문가들은 거부권 정국의 장기화가 결국 민주주의 후퇴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어떻게든 타협 과정을 거쳐 균형안을 마련해내는 일종의 ‘정치의 과정’이 사라졌다는 것.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원래 대통령 거부권은 입법부의 문제를 차단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 같은 수단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대통령의 정치적 대응 수단처럼 변질됐다”며 “입법부가 충분한 논의 없이 정치적 공세만 주고받다가 법안을 강행 처리해 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동안 역대 대통령은 총 66건의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3권 분립’ 등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될수록 거부권 행사 건수가 줄어들는 경향을 보여왔다. 역대 가장 많은 거부권을 행사했던 대통령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으로 총 45건을 행사했다. 이어 노태우 전 대통령이 7차례로 뒤를 이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6번, 박정희 전 대통령이 5번을 행사했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건수는 각각 1회, 2회에 그쳤고, 문재인 전 대통령은 거부권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최 원장은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성숙해질수록 거부권 행사와 같은 극단적 수단의 활용이 줄어드는 것이 맞다”며 “그런데 지금은 야당도 정부가 반대하는 법안을 ‘툭’ 하고 던지고, 대통령도 아랑곳하지 않고 ‘탁’ 거부권을 행사하는 모양새다. 협치나 정치를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정치의 실종 속 여야 모두 민생 입법 성과에는 미흡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로 내놓는 정책에 무조건 반기를 드는 구조가 되다 보니 결국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
실제 정부가 근로시간 유연화 내용을 담은 노동시간 개편안을 내놓자 민주당은 곧장 ‘주 4.5일제’ 카드를 꺼내 들며 맞대응했다. 최근 전국을 강타한 전세사기 사태를 두고도 여야는 임차보증금 반환과 선보상 후구상권 청구 등 각자의 방안을 고집하느라 한동안 신경전만 반복했다.
이종훈 평론가는 “결국 정부가 추진하려 했던 노동시간 개편안이나 야당이 추진하려 했던 양곡관리법 등 최근 나온 정책이나 법안 중 제대로 시행된 게 하나라도 있느냐”며 “결국 피해는 국민이 본다”고 일갈했다.
●“여야 모두 심판받을 것”…‘제3지대’ 부상
이 때문에 여야 대치 국면이 이어질수록 국민의 피로도는 극에 달하고 ‘정치 혐오’만 팽배해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양당 모두 여론을 업지 못한 채 무의미한 ‘힘자랑’만 하고 있다”며 “여론이 적극 지지하는 법안이나 정책을 내놓으면 상대 측도 동의할 텐데, 양쪽 모두 그게 안 되니 무리해서 정치적 공세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여론도 한계치를 느끼고 있는 만큼 여야 모두 다음 총선에서 심판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28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1명 중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답한 무당층 비율은 27%였다. 이러다 내년 총선에서도 무당층 지지율이 1위를 차지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정치권에선 무당층을 흡수하기 위한 제3지대 구축 움직임도 본격화됐다. 민주당을 탈당한 금태섭 전 의원은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추석 전에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윤 실장은 “지금은 여야 모두 극단적 강성 지지층을 바라보며 강경 대치를 이어가고 있어 정치권 내에 충격을 흡수하는 ‘버퍼 존’이 없다. 그렇다 보니 양당이 아닌 중도층, 온건파 세력을 원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새롭게 꾸려진 여야 원내지도부가 이런 여론을 반영해 강대강 대치 국면을 끝내고 협치 분위기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민주당 박광온 신임 원내대표와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당내 온건·협상파로 분류된다.
박 원내대표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윤 원내대표가 ‘의회 정치 복원’이라는 과제를 제시했듯이 국회가 원만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여야 원내지도부가 소통을 강화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원내대변인도 박 원내대표 선출에 논평을 내고 “평소 온화한 성품과 합리적인 의정 활동을 해온 박 원내대표의 선출이 우리 국회의 의회주의 복원과 여야 관계 회복을 위한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안규영 정치부 기자 kyu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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