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수 대신 들고온 엄마의 궤짝… 단칸 셋방 스무 번 이사에도 못 버렸다
올해는 대한민국 수립 75주년이다. 이 기간 신생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 세계사에 유례없는 성장을 이룩했다. 그 치열했던 시간을 담은 현대사의 보물(寶物)을 발굴한다. 평범해 보이는 물건에도 개인의 기억과 현대사의 한 장면이 깃들어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 이어 ‘연극계 대모(代母)’라 불리는 배우 손숙의 ‘보물’을 들여다본다.
“엄마, 나 저것 하나만 들고 갈게요!” 1965년, 고려대 3학년생 손숙이 졸라대자 어머니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없는 살림에 금지옥엽 키워 명문대 보낸 딸이 연극판에 뛰어들더니, 이젠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배우 선배와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경상도 양반집 완고한 종부였던 어머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딸은 잡동사니를 넣어두던 낡은 궤짝을 혼수 대신 가져갔다.
◇58년 전 어머니가 주신 ‘낡은 궤짝’
배우 손숙(79)에게 그 궤짝은 어머니의 체취 같은 것이 됐다. 10여 년 동안 불광동, 돈암동, 미아리 단칸 셋방을 스무 번 넘게 이사 다녀야 했던 곤고한 결혼 생활이었다. 국립극단 단원이 됐지만 월급은 달랑 2만원이었다. “지금 돈으로 50만원이나 될까….” 아이 분유 살 돈도 없었다.
지금도 크게 다를 건 없지만 그 당시 연극은 밥을 먹여 주는 직업이 아니었다. 백성희, 장민호, 김동원 같은 선배, 전무송, 이호재, 윤문식, 김재건 같은 동료들과 고단한 1960~70년대의 연극판을 버텨냈다. TV나 영화 출연도 쉽지 않았고 어쩌다 그런 데 나오면 극장에서 곱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왜 연극을 했냐고요? 나도 몰라요. 연습실, 분장실, 무대를 왔다 갔다 하면서 다른 삶을 사는 게 그렇게도 행복했으니까요.”
이사 갈 때마다 짐이 됐던 그 궤짝은 버릴 수 없었다. 그 시절 미운 딸을 음으로 도와줬던 어머니의 정이 서린 물건이어서다. 지금도 일산 빌라 자택 한 구석에 놓인 그 궤짝 안에 고운 한복만 접어 보관하고 있다. 손숙은 지난 1월 무대 60주년 기념 연극 ‘토카타’의 연습을 위해 집을 나오다 미끄러져 부상을 입었다. 공연은 8월로 연기됐다. 석 달 동안 집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어머니와 동료 연극인들을 포함해 많은 고마운 분의 얼굴이 스쳐갔다. 감사할 게 많은 인생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가장 자랑스러운 이해랑연극상 트로피
그렇게 고마운 분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손숙의 연극계 첫 번째 스승이자 ‘한국 연극계의 거목(巨木)’이라 불린 연출가 이해랑(1916~1989) 선생이었다. 손숙은 1997년 받았던 제7회 이해랑연극상 트로피를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지금껏 숱한 상과 훈장·표창을 받았지만 이해랑연극상이 가장 자랑스럽다고 했다. “‘햄릿’을 연출하다 갑자기 쓰러지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젊은 나이셨다”고 했다.
손숙은 이해랑 연출 ‘활화산’ ‘파우스트’ ‘손탁호텔’ 등에 출연하며 배우의 길을 제대로 걷게 됐다. “그때 연출가들은 대본을 집어던질 정도로 강압적인 경우가 있었는데, 이해랑 선생은 한 번도 큰소리를 내지 않으셨어요.” 돌이켜 보면 그에게서 연극의 기초뿐 아니라 인간적인 됨됨이도 함께 배웠다. 남편 사업이 실패해 빚더미에 앉고 체중이 42㎏까지 빠졌을 때 이해랑은 “손숙! 너 무슨 일 있냐”고 묻더니 위로하고 챙겨주더라는 것이다.
리얼리즘 연출가인 이해랑은 발성(딕션)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배우들이 대본 읽는 연습을 할 때 한 페이지 넘어가는 데 한 시간씩 걸렸다. “대사를 또렷한 육성(肉聲)으로 객석에 전달하는 게 배우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죠.” 손숙은 “요즘 드라마 촬영을 가면 마주 앉아 얘기하는 장면에서 상대 젊은 배우가 뭐라고 말하는지 당최 들리지 않을 때가 있는데 발성 기초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며 “그런데도 나중에 TV를 보면 잘 들려 신기하다”고 했다.
손숙은 “이해랑 선생 같은 분들이 어려움을 딛고 탄탄하게 다져 놓은 ‘K연극’의 기틀 위에 오늘날 K드라마의 영화(榮華)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했다. ‘기생충’의 송강호, ‘길복순’의 설경구, ‘오징어 게임’의 박해수, ‘더 글로리’의 박성훈(전재준 역), 정성일(하도영 역) 등은 모두 연극계 출신 배우들이다.
손숙도 ‘더 글로리’에서 에덴빌라 주인 할머니 역으로 나왔다. 대본에서 “우리 봄에 죽자”란 대사를 보고 출연하게 됐다. 어린 동은에게 ‘죽지 말고 살자’란 뜻으로 한 그 대사를 손숙의 발성으로 들은 뒤 김은숙 작가도 펑펑 울었다고 한다. 초가을 해 지기 직전 대역도 없이 한강에 뛰어들었는데 젖은 옷은 무겁고 물은 너무 차가워 “정말 죽을 뻔했다”고 회고했다. 그 덕에 연극과 친숙하지 않은 젊은 시청자들이 식당이나 병원에서 데뷔 60년 맞은 배우를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다시 배우로 서게 한 ‘담배 피우는 여자’ 대본
그 많은 연극 대본 중에서도 손숙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1996년 모노드라마 ‘담배 피우는 여자’다. 김형경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을 임영웅이 연출해 산울림소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그 직전 ‘셜리 발렌타인’이 너무 힘들어 모노드라마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두 번째 스승과도 같은 임영웅의 연출작이라 결국 하게 됐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주인공을 살리기 위해 입에 대지도 않던 담배를 하루에 한 갑 반 피워가며 열연했다.
연출가 임영웅에 대해 그는 “배우라는 정체성을 다시 깨닫게 해준 분”이라고 말했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강권으로 손숙은 환경부 장관 자리에 올랐다가 한 달 만에 물러났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절대로 하지 않을 거예요.” 새벽만 되면 자다가 깨서 벽을 치는 날이 계속될 정도로 힘들었을 때 임영웅이 전화를 했다. “연극하자!” “네? 선생님, 제가 지금 어떻게 그걸 해요.”
그러자 임영웅이 버럭 호통을 쳤다. “이봐! 연극배우가 연극을 해야지 왜 못해! 네가 정치인이야?” 손숙은 그때 차범석 작 ‘그 여자의 작은 행복론’으로 다시 무대에 선 뒤 지금껏 매년 연극 작품을 하고 있다. “그 호통 한마디에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나는 배우’라는 자의식을 깨우쳐 줄 스승이 계시다는 게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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