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初聲이라는 방패… 그래도 예의는 지킵시다
“직접 표현 피한 추상적 기재”
‘눈 가리고 아웅’ 횡행 우려도
언어 사용의 저질화 경계를
무슨 뜻이냐고요?
아… 어젯밤에 술김에, 아니 아침 되면 까먹을까 봐 미리 카톡 남긴 건데 새벽부터 놀라셨나봐요. 흥분하지 마시고요. 별 뜻 아니라니까요. 초성 그대로예요. ㅂㅅㅇ ㄷㅈㄹ, 그러니까 빙수에 돗자리? 날도 더운데 풀밭에 돗자리 깔고 빙수나 한 그릇 하자고요. 병… 뭐요? 뒈지긴 누가 뒈져요. 둘러대는 게 아니라 진짜라니까요. 제가 어떻게 ㅅㅂㄴ, 아니 선배님께 욕설을 하겠습니까. 겁도 없이.
왜 초성으로 썼냐고요? 그야 제 마음이죠. 아니, 설명을 드리자면, 피곤한데 타자 치기 귀찮잖아요. 누가 요새 길게 써요, 솔직히 선배님도 초성 많이 쓰시잖아요. 저번에 부장님한테 왕창 깨진 다음에 저한테 카톡으로 뒷담화하실 때도 장난 아니셨으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아, 예 뒷담화가 아니라 건설적 비판요. 비꼬는 게 아니고요. 네? 고소하겠다고요?
무슨 그런 ㅂㅅ 같은 말을 하세요. 아니, 비수(匕首) 같은 말, 너무 날카로우셔서요. 근데 지식 자랑 많이 하는 편이시면서, 신문은 안 보세요? 초성으로 욕해도 그거 모욕죄 성립 안 돼요. 지난주에 법원에서 무죄 판결 내렸잖아요. 채팅창에 ‘ㅂㅅ아’ ‘ㅂㅅ 같은 소리’ 쳤다고 누가 고소했는데, 문언상 욕설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추상적 표현이라고요. 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편의 코미디 같긴 한데요, 검찰이 상고 포기했대요. 선배님, 판사보다 똑똑하세요? 그나저나, 엊그제 상갓집에서 현금 없다고 저한테 빌려간 5만원 왜 안 주시나요? 아, GSGG!
제가 요새 영어 공부에 심취하다보니 그만…. 선배님께서 평소에 하도 정치 얘기를 자주 하시니까 불현듯 뇌리를 스쳤나봐요. 죄송요. 저도 해석은 잘 안되지만, Government Serve General G라는 뜻이라던데. 유명하잖아요. 서울대 법대 나온 분이 그러던데요. 참, 자꾸 우기시면 개 눈에 뭐만 보이는 격이라고요.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넘어갑시다 좀. 자꾸 눈 가리고 아웅한다고요?
말 나온 김에, 물론 저는 절대로 욕한 건 아니지만요, 욕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알아먹으면 열받고, 못 알아먹으면 별거 아닌 거. 선배님께서 저번 선거에서 꼭 찍으라고 했던 그분처럼, 힘 있으면 귓바퀴에 대고 쌍욕을 해도 누가 잡아나 갑니까? 힘 없으면 말 한 마디 못하고 빌빌대는 게 현실이고, 입바른 소리 했다가는 명예니 훼손이니. 그래서 예부터 풍자가 있고 해학이 생긴 거 아니겠냐고요. 다 같은 서민끼리, 누가 초성으로 조금 시부렁거렸다고 난리치면 얼마나 각박해요. 안 그래요?
그래서 예전에 선배님께서 저한테 쌍시옷 발음 자주 내가며 훈계하실 때도 그냥 넘어간 거예요. 그런 분이 어제 술자리에서처럼 평등이니 정의니 열강하실 때마다 얼마나 웃긴지 몰라요. ㅈㄹ, 아니 재롱 떠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자꾸 화내지 마세요. 이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요. 초성 퀴즈 푸는 것처럼 전두엽 자극도 되고 좋잖아요. 아, 이쯤 했으면 그만 하시죠. 술도 덜 깼는데 꼭두새벽부터 채팅으로 자꾸 이러쿵저러쿵 지치네요.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이게 몇 분째예요. 그냥 전화 통화로 하자고요? 또 푸닥거리 하시려고요? 그래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녹음은 해야죠.
세상이 요지경이라고요? ㅅㅂ, 아니 시방 그걸 이제 아셨어요?
※위 글은 가상의 대화입니다. 욕설을 연상케 하는 단어 ‘ㅂㅅ’을 사용했더라도 모욕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지난달 26일 서울북부지법 형사항소4부 판결에 기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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