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아주 특별한 ‘전세사기 반상회’
수년 전 인기를 끈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지만, 알고 보면 판타지물이다. ‘쌍문동 5인방’은 끼니 때마다 반찬을 주고받고, 집안 대소사까지 모든 정보를 공유한다. 지금은 사라진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과 결핍을 드라마가 환기시켰다고 할까.
그 쌍문동 골목처럼, 과거엔 이웃끼리 인사·음식을 나누고 수다를 떨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1976년 5월부터 정례화된 반상회였다. 1976년 6월1일자 경향신문에는 ‘우리는 이웃사촌 다정한 인사 전국 25만곳서 일제히 첫 반상회’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웃과의 논의의 장이었던 반상회는 점점 정부시책을 홍보하며 정치적으로 변했고, 출석률은 떨어졌다. 반상회가 다시 활발해진 건 전두환 정권 때다. 아파트가 많아지면서 ‘부동산 반상회’가 등장한 것이다. 이때부터 주민들이 아파트 가격을 담합하는 풍토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반상회를 유지하는 곳은 손꼽을 정도지만, 이웃과의 친목 도모를 위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오랜만에 아주 ‘특별한 반상회’가 열렸다. 지난달 29일 인천 미추홀구 한 아파트 905호에 음식을 싸 들고 모인 주민 20여명은 아이들 이야기로 수다꽃을 피웠다. 이 반상회는 ‘전세사기 피해자 단체채팅방’에서 “우리 만나자”는 얘기로 시작됐다. 이들은 전세사기로 보증금 9000만원을 잃고 지난달 17일 극단적 선택을 한 청년의 이웃들이다. 이 아파트에선 전세사기 피해로 60가구가 경매에 넘겨졌다. 반상회는 또 다른 비극이 없어야 한다는 맘으로 열렸다. “905호님, 우리 얼굴은 진짜 처음 보네.” “1102호님, 제가 생각하던 인상이랑 많이 다르시네.” 서로 안부를 물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정부·국회가 임시방편과 대책을 논의하지만 이제껏 달라진 건 없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가족에게, 떠난 이들에게 미안하다.
늘 그렇듯 지치는 싸움은 피해자들의 몫이다. 주민들은 격주로 만나 서로를 다독이기로 했다. 당장 해결책은 없어도 답답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함께 눈물 흘리는 게 이들에게는 큰 위안이다. 막막하지만 피해자들은 또 그렇게 연대하며 살아갈 힘을 얻고 있다. ‘작은 연대’는 생각보다 큰 힘이 있다. 피해자들을 또 절망케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명희 논설위원 min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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