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갑갑하고, 때로는 잔인한 예술 현장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장편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4월에 황당하고 갑갑하며 안타까운 일들을 많이 보고 겪어 이를 전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황당한 일은 대구 수성구에 있는 수성아트피아가 5월 1일 재개관 기념 음악회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올리려고 한 일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수성아트피아는 대구시립예술단(대구시립교향악단과 대구시립합창단)을 무대에 세우려고 대구시 조례에 따라 종교화합심의위원회의 승인을 요청했으나 심사에서 거부되었다고 합니다.
작품에 기독교적인 성향이 많기 때문이라는 이유였죠. 이 위원회는 또 심의 안건에 관한 결정방식으로 만장일치제를 택했다고 하니, 마치 봉건시대의 재래같은 풍경마저 연상시킵니다(참고로 지엄한 헌법재판소 판결도 다수결 방식인데 말입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객석'의 독자분들이라면 다 아실겁니다. 클래식 음악의 생성 과정이나 발전에 종교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해왔는지를. 그럼에도 종교화합심의위원회가 예술에 칼질을 한다는 것은 음악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들리는 바로는, 예술을 실제 행하는 일부 시립예술단 단원들의 비협조로 인해 이번 사태가 일어난 것 같다니 더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다행히 수성아트피아측은 대구광역시 소속이 아닌 자체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구미 시립합창단, 대구 오페라콰이어로 출연진을 대체하여 공연을 강행 중이라고 합니다.
갑갑한 일, 두 번째입니다. 이건 아마 독자 여러분들도 겪어보셨을 일일 것 같습니다. 제가 다녀본 해외 음악 페스티벌의 개막식에는 예술감독이 주인공이 되어 행사의 진행 과정이나 축제가 품은 테마, 방향성 등을 설명하는 등 음악인들이 개막식 앞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해당 음악회나 페스티벌에서 그 도시의 시장이나 정치인들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거꾸로입니다. 공무원과 정치인들이 주도가 되어 장황하게 개막인사를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참석 못한 VIP들의 영상 메시지까지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예술감독이 짧게 한마디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행태는 국비나 도· 시비 예산에 의존해 집행되는 페스티벌일수록 더합니다. 이를테면 구청에 소속된 공연장에서는 구청장·국회의원·구의원 대표가 차례로 나와 인사말을 하고, 지방에서는 시장·국회의원·시의원 대표와 중앙정부 고위층의 영상 메시지가 나오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행태는 국민들이 보러온 축제에 자신들이 신경을 썼다고 생색내는 일에 불과합니다. 정작 페스티벌을 주관하는 대표이사나 예술감독은 시간에 쫓겨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끝내는 개막식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물론 축제를 위해 예산을 편성해 주고 행정적으로 도와주는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이 고맙기는 합니다. 음악가들이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로 화답하는 것도 인지상정이지요. 그러나 공치사로 가득하거나 음악회 개막과 관련없는 정치 이야기는 이제 그만 들었으면 합니다. 좀 강하게 말한다면 그들에게 아예 마이크를 건네주지 않으면 어떨까요? 설사 부탁이 들어온다 해도 담당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이 정중하게 거절하는, 성숙한 문화 매너를 보고 싶습니다.
마지막 안타까운 일은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질문 하나로 대신합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서울시오페라단에 직원이 몇 명인지 아시는 분이 계신지요? 서울에는 국비로 운영되는 국립오페라단이 예술의전당 안에 있고요, 서울시오페라단은 세종문화회관에 있습니다. 그밖에도 오페라가 좋아, 어렵게 공연을 이어가는 민간 오페라단도 다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체나 소속 직원들을 대체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요? 이름만 '국립'인 국립오페라단에는 전용 극장은 물론, 단원, 합창단, 전문 오케스트라도 없습니다. 서울을 대표하는 서울시오페라단에는 단장과 정규직원 1명만 달랑 있습니다. 그러니 소속 직원이 2명만 있는 서울시오페라단은 정기연주회 때 임시직원을 이용하여 공연을 치르는, 어떻게 보면 전 세계에서 효율성과 가성비가 최고인 단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발적인 선택과 상황일까요?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저희 집 근처의 행복복지센터만 하더라도 예전에 비해 직원들이 부쩍 늘어나 있는데요, 예술을 통해 국민들의 정신적인 복지를 지향하는 예술단체들 규모는 어찌 이리 초라한지 모르겠습니다. '현대의 전쟁은 장비에 따라 승패가 결정난다'는 말처럼, 품격 있는 공연을 위해 제대로 된 조직 설립이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요?
두 오페라단 모두 대한민국 공연계를 대표하는 단체이니, 그에 걸맞는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뒤늦게 몰아친 추위와 황사가 우리를 힘들게 했던 '잔인한 4월'은 가고, 희망찬 5월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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