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악의 평범성`과 민주당 돈봉투
1961년 4월 11일 이스라엘 예루살렘 '정의의 집' 재판소.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50대 중반의 평범한 남자가 법정에 섰다. 마른 체구, 커다란 안경, 깔끔한 정장.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를 보이는 이 사람은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 겸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공개재판을 보던 사람들은 그가 매우 사악하고 악마와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재판을 진행하는 재판장마저도 생각이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았던 유대인 말살 정책의 실무자였던 만큼 당연하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아이히만은 오히려 평범한 사람이었다. 재판정에서 진술하는 어조도 차분했다. "저는 상부가 시키는 일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입니다. 나치 정권 아래의 독일에서 히틀러의 말은 곧 법이었습니다. 법을 준수하는 것은 공직자가 당연히 지켜야 할 덕목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상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지시한 사항들을 성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일관했다. 나아가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유태인 수백만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스실 열차를 개발한 일에 대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제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제 권한이 아니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충성심'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군인이라는 직업을 갖고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으니 죄가 될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장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일제히 충격에 빠졌다.
그 재판을 지켜보던 또 다른 한 사람.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는지 생각했다. 그 때 아렌트가 떠올린 개념이 '악의 평범성'이다. 아이히만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악한 의도를 가지지 않아도, 평범하게 하는 일 중 무엇인가는 악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한 평론을 작성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그리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더불어민주당 전체를 혼란에 빠뜨린 '2021년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도 악의 평범성이 적용된다. 민주당 다수 의원들과 구성원들은 전당대회 자체를 자연스럽게 '돈 선거'로 인식한다.
실제 대회를 치르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기도 하다. 선거를 치르기 위한 후원금부터 메시지 비용, 캠프 사무실 임차료, 기탁금, 대회 인건비, 숙박 유세단 경비, 대의원 식사비용 등 모든 게 돈이다. 적게는 수천만원 많게는 수억원까지 든다. 결국 자신의 사비마저 탈탈 턴다.
어느 순간부터 돈이 돌면서 생기는 청탁이나 뇌물에도 '죄의식'이 없어진다. 민주당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한 당직자는 "이전에 잠실운동장을 빌려서 큰 규모로 선거를 치를 때에는 지역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이 있는 숙소까지 돈이 전달될 정도"라며 "이런 문화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고 토로했다.
"대개 실무자들의 차비, 기름값, 식대 수준"(정성호 의원), "50만원은 사실 한 달 밥값도 안 되는 돈"(장경태 최고위원), "역시 큰 그릇 송영길"(박지원 전 국정원장), "의심과 의혹 제기만으로 당 구성원을 내보내는 건 정당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우상호 의원), "송영길은 물욕이 적은 사람"(김민석 정책위의장) 발언도 당내 전당대회 문화와 무관치 않다는 얘기가 나온다.
'쩐당대회'로 인식된 시간이 짧지 않다보니 문제의식을 전혀 못 느낀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의 눈높이게 항상 벗어날 수 밖에 없다. 당내에선 이번 논란을 계기로 조직 선거의 폐단을 극복하고 정책과 비전으로 승부를 겨룰 수 있도록 당내 선거를 손질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말만 번지르르할 뿐이다.
우선 당내 구성원들의 인식부터 상식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국민의 시각으로 봤을 때 선거에서 당선을 위해 돈봉투를 주고 받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문화다. 작은 단위의 단체에서도 장을 뽑을 때 '돈 선거' 논란이 일면 수사대상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죄책감조차 없으면 더 위험하다. 민주당은 '전당대회 돈 봉투'를 평범하게 인식하는 '악의 평범성'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saehee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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