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 바이~ ‘아메리칸 파이’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 김진철 | 문화부장
윤석열 대통령이 ‘아메리칸 파이’를 불렀다고 해서 유튜브를 찾아봤다. 한 소절 부르기로 하고 “어 롱 롱 타임 어고~”(a long long time ago)로 시작해 일곱 소절까지 나아갔지만, 빠르고 흥겨워지는 대목 직전에 끝나 아쉬웠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봤다. 특유의 미소를 씨~익 지으며 “바이바이 미스 아메리칸 파이~”(bye-bye, Miss American Pie) 해줬더라면?
돈 매클레인이 1971년 발표한 이 노래는 1959년 전설적인 록스타 버디 홀리의 죽음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곡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미국 사회를 잘 은유한 ‘서사시’여서 2016년 미국 의회도서관이 국가기록물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매클레인이 직접 쓴 자필 가사 원본은 2015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20만달러(약 14억원)에 팔려나갔다.
8분이 넘는 노래인 만큼 가사는 무척 길다. 노랫말을 추려 보자. 음악이 죽은 날, 말라버린 제방과 술 마시는 노인들, 로큰롤과 죽음, 추락하는 새, 아이들의 비명, 연인들의 울음, 꿈을 잃은 시인들…. 버디 홀리를 비롯해 밥 딜런, 비틀스, 존 레넌, 엘비스 프레슬리, 롤링 스톤스, 재니스 조플린 등이 은유되는데, 신나는 음률에 맞춰 떠올리기는 어려운 노랫말이다.
이 난해한 단어들을 엮어낸 은유를, 정작 매클레인은 자세히 풀어주지 않았다. 다만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 병들어가고 있는 미국의 흥망성쇠를 담으려 한 가사라고 짚었다고 한다. 가수가 거듭 작별을 고하는 대상은 ‘아메리칸드림’이라는 풀이도 있다. 미 의회도서관은 “밝고 활기찼던 1950년대 미국 정치와 대중음악이 1960년대 들어 암울해지는 상황을 보여주는 노래”라고 평했다.
미국의 1960년대는 어땠는가. 백인 중산층 중심 사회질서가 모순을 드러내고 흑인과 여성이 권리를 되찾기 위해 일어선다. 진보에 기운 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는 1963년 암살당하고, 인종차별에 맞서온 마틴 루서 킹 목사는 1968년 백인우월주의자의 총탄에 쓰러진다. 미소냉전이 가속화하고 급기야 베트남 전쟁에서는 잔혹하고도 무능한 미국의 민낯이 까발려진다. 미국은 안팎에서 모두 밀리고 있었다.
60년이 지난 지금의 미국은 어떨까. 그토록 강조해온 동맹국 대통령마저 도청하고 거리낌 없이 자국이기주의적 산업정책을 펼친다. 동맹국의 경제마저 쥐고 흔들려 한다. 한국 기업들이 낭패를 겪든 말든 미국 안중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전국 일본의 뻔뻔한 과거사 대응을 승전국 미국이 거들고 식민피해국 한국은 거듭된 ‘의문의 1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기소와 잇단 총기난사 참사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겠다.
은유는 단일한 해석에 기대지 않는다. 은유의 힘은 모호성에 있다. 은유는 외교적 언사에 활용돼 전략성을 띤다. 미·중·러·일에 둘러싸여 분단된 채 핵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전략적 모호성을 방패 삼아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의미심장한 가사를 경쾌한 곡에 담아 부를 때 쏟아진 박수갈채 뒤에는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닌데’라는 평가가 보태져야 하는 게 아닐지 모르겠다.
아쉽다는 것이지, 노래로 양국의 70년 우정을 돈독히 하고 온 부분까지 비난하는 대열에 동참하고 싶진 않다. 영상을 보면, 윤 대통령은 국내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흐뭇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주요 인사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다. 자국 지도자가 타국에서 환대받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길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전매특허로 통하는 ‘도리도리’가 조금 거슬렸지만, 허스키한 목소리도 노래와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열심히 국익을 챙기고도 부당하게 비난받고 있다고 스스로 여긴다면, 왜 그런지 곱씹어보는 게 적절한 태도일 것이다. 엄중한 국제정세 가운데 한국 대통령의 방미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면, 현찰 주고 어음 받아온 지도자를 국민이 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폭풍이 불어올 기미는 더욱 뚜렷해지고, 미국의 환대마저 의심스러워지고 있다. “음악이 죽은 날”(the day the music died) 이후에는 ‘바이바이’ 해봤자 별 소용 없을 텐데, 걱정이다.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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