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별교섭 서명운동, 기업별 이기주의서 연대 회복할 지렛대

한겨레 2023. 5. 1.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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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인 1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 일대에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주최로 ‘노동개악 저지! 윤석열 심판! 5·1 총궐기 2023 세계노동절대회’가 열려 참석자들이 대통령실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왜냐면] 강신준 |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윤석열 정부 들어 노사 관계는 정부가 키워낸 노-정 대립에 묻혀 말 그대로 아노미 상태다. 체계 없이 추진한 정부의 노동개혁은 비현실성 속에서 헤매고 있고 노동 진영은 정부의 무차별적 공세에 당장 급급한 수세적 대응에 매몰해 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미래지향적 한 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이 노동절을 맞아 초기업(산별) 교섭의 법제화를 위한 서명운동에 돌입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5만 명 서명의 요건을 채우면 국회는 입법청원으로 접수해 논의할 의무를 갖게 된다.

이 선언은 두 가지 의미에서 극히 중요하다. 하나는 당면한 최대 노동 현안인 비정규 노동 문제를 푸는 핵심 열쇠라는 점이다. 비정규 노동은 지금까지 수사로만 제기했을 뿐 막상 진정한 해법이 실천에 옮겨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비정규 노동의 원인은 고용의 이중 구조이고 그것을 결정하는 단위는 개별 기업이다. 누가 비정규직인지 결정하는 사회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기업 단위에서 개별 자본가가 이를 마음대로 결정한다. 따라서 해법은 개별 자본가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도록 기업 외부에서 사회적 노동 기준을 정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이를 결정할 초기업 수준의 교섭은 존재하지 않고 이것을 가로막는 일차적 장애물이 바로 노동법이다.

핵심 쟁점은 현행 노동법이 기업 단위의 교섭만 인정하고 초기업 단위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초기업 노조의 교섭도 기업 단위로만 인정하고 있다. 사실 국회에서는 과거 초기업 교섭 법안이 두 번 발의된 적이 있는데 모두 초기업 교섭을 기업별 교섭과 중복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논의를 중단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장의 가격 기능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대규모 농산물 시장에서 농산물의 도매가격을 먼저 결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소매가격을 결정하듯이, 노동 시장에서도 초기업 단위에서 노동력의 도매가격을 먼저 결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기업 단위에서 소매가격을 결정해야 시장의 가격 기능이 올바로 작동한다. 도매가격이 없으면 기준을 잃은 소매 시장에서는 ‘일물일가의 법칙’(시장에서 같은 종류의 상품에 대해서는 하나의 가격만이 성립한다는 원칙)이 작동하기 어렵고 큰 혼란을 초래한다. 현재 노동 시장에서 비정규 노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각종 모순과 혼란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따라서 현행 노동법에 도매가격의 기능을 도입하는 것이 시장의 혼란을 수습하는 첫 번째 해법이다.

법제화 선언이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역사발전 방향과 부합한다는 점에 있다. 우리 민주노조운동은 1990년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창립선언문과 1995년 민주노총의 강령에서 초기업 교섭을 운동의 목표로 명시했다. 사실 이 강령에 의거해 1998년 보건의료노조가, 2001년 금속노조가 산별노조로 조직을 전환한 것이었다. 초기업 교섭은 우리 노동운동의 전략적 목표였고 이제 법제화 서명운동은 바로 그런 역사를 계승하는 일이다. 중등학생보다 대학생이 성숙한 까닭은 중등학교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2층은 반드시 1층 위에만 세워지는 것이고 역사발전은 이처럼 과거를 밑바탕으로 그 위에 새롭게 쌓아나감으로써만 이뤄진다. 일찍이 진보의 과학을 정립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이 일러주는 교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선언은 이제 우리 노동운동이 역사발전의 올바른 궤도에 진입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서명을 통해 입법청원이 이뤄진다 해도 이 법이 곧바로 국회에서 통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서명은 1회적 이벤트가 아니라 최종 입법을 이룰 때까지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운동이다. 이 운동에서 우리 노동운동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법안의 핵심 개념은 비가 쏟아지는 자본주의 환경에서 우산(교섭권)을 가진 조직 노동자가 우산을 갖지 못한 미조직 노동자에게 자신의 우산을 넓게 펼쳐 함께 비를 피하는 것에 있다. 기업별 교섭이 강제된 조건에서 우리 노동운동은 그동안 스스로도 기업별 교섭의 폐해에 갇혀 있었고 사실 윤석열 정부의 노동에 대한 공세는 바로 이 폐해를 빌미로 삼은 것이었다. 미조직 노동자의 보호를 앞세운 이 서명운동은 우리 노동운동이 편협한 기업별 이기주의에서 연대의 사회성을 회복하는 지렛대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운동은 무분별한 정부의 공세에 맞서 우리 노동운동이 반격의 계기를 마련하는 유효한 출발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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