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맡겼는데”…공인중개사 전세사기, 정말 막을 방법 없나
2년간 법 위반 중개보조원 처벌 0명
중개사협회, 권한 확대 요구
전문가들은 “책임강화가 우선”
개인의 일탈로 보기 힘든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를 막아낼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높은 수수료를 받으면서도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는 소비자 불만족에서 한발 더 나아가 국가가 유일하게 공인한 전문가를 믿을 수 없다는 공포에 분노마저 일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개사들의 실질적 조사권한을 넓히는 동시에 법적 책임을 강화하고 내부 규율을 통해 서로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부동산업계 등에 따르면 경기 구리경찰서는 전세사기를 벌인 일당의 전세계약을 중개한 공인중개사 40여 명을 입건했다. 이들의 법에서 정한 것보다 많은 중개수수료를 챙긴 혐의를 받고 있는 데 경찰은 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는지도 살펴보고 있다.
앞서 인천 미추홀구에서 발생한 전세사기와 관련해 구속된 일당 61명 중 9명이 공인중개사다.
경찰청이 지난해 7월부터 올해 3월 말까지 실시한 특별단속을 통해 입건된 피의자 2188명 중에서는 19%에 해당하는 414명이 공인중개사 또는 중개보조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이 관련 상황 파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전세사기 사례와 여기에 연루된 공인중개사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전세사기는 공인중개사의 도움 없이 성립이 어렵다”면서 “단순히 계약서만 써줬느냐 아니면 적극적으로 피해자가 된 세입자를 끌어모았느냐와 같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 지역에서 수십수백 건의 거래를 하고 그만큼 많은 사람을 속이는 데 계약서 작성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공인중개사가 이를 모를 수가 없다”면서 “상대적 약자인 세입자 보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분들이 더 많지만, 공인중개사로서 해선 안 될 일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발생한 사기도 그렇지만 공인중개사가 전세사기에 가담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게 더 문제다.
엄정숙 법무법인 법도 변호사는 “공인중개사에게 매물에 관한 위험 설명 의무 등을 강화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그 기준을 명확히 정하기 어렵고 의무가 있어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라며 “법·제도 측면에서 마땅한 방안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계약서를 작성할 수 없는 중개보조원을 전면에 내세워 영업하는 경우가 늘어났는데 이들의 ‘이기적’ 영업이 횡행하면서다. 최근 전세사기 국면에서도 범행에 가담한 중개보조원 4명이 입건됐다.
이런 실정인데 최근 2년간 공인중개사법 위반으로 실형을 확정 받은 중개보조원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본인이 공인중개사인 척 매물을 보여주고 계약을 주도해도 감옥에 갈 일은 없는 셈이다. 중개보조원 제도에 대한 대대적 손질이 필요하단 지적이 나온다.
법조계에 따르면 중개보조원이 공인중개사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최근 2년간(2021년 4월~2023년 4월) 유죄판결이 확정된 32건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29건이 벌금형이다.
나머지 3건은 징역형 집행유예로, 실형을 선고받은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32건엔 중개보조원 관련 문제로 기소된 공인중개사들도 포함돼 있다.
현행법은 공인중개사가 아닌 이들이 공인중개사 명칭을 사용하면 1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게 명시해놨지만 실제 처벌은 솜방망이인 것이다.
우리나라 부동산 공인중개 제도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 중 하나가 ‘중개보조원’ 제도다. 중개보조원은 공인중개사를 보조하는 사람인데, 이들 역할을 명시해둔 뚜렷한 규정이 없다.
현장에서 이들은 주로 고객을 매물현장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중개보조원이 되려면 4시간가량 직무교육만 받으면 되며 별다른 자격증은 필요 없다. 진입장벽은 낮은데 비해 이들을 관리할 가이드라인은 허술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이에 중개보조원 제도에 대한 대대적 손질이 필요하단 지적이 나온다. 중개보조원이 매물을 보여주는 경우가 흔하지만, 이를 중개보조원이 할 수 있는 업무로 볼 수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다.
공인중개사가 이행보증서를 써줬다해도 법의 보호는 받을 수 없다.
인천 전세사기 피해자들 중 일부는 공인중개사가 써준 이행보증서만 있으면 전세보증금을 못 돌려받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전세사기를 인지한 뒤 중개사에 이행보증서대로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보증금을 줄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중개사 개인이 써준 이행보증서가 안전 장치가 될 수 없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피해자를 울린 이행보증서는 관련법에 따른 문서가 아니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 관계자는 “이행보증서는 공인중개사법에도 없는 내용”이라며 “전세사기 건은 계약상 신뢰의 문제가 있다 보니 임차인에게 뭔가를 약속해주려고 쓴 것 같다”고 설명했다.
중개사가 고의·사기로 피해를 준 경우 법에 따라 보상받을 수 있는 제도는 협회에서 발급한 ‘공제증서’ 제도다. 공제증서는 중개사 개인의 사기 등 위법 행위로 인한 피해를 최대 2억원까지 협회가 대신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피해 사례 1건당 최대액이 아닌 중개사별 최대액이라 이번 전세사기처럼 중개사 1인이 다수의 이행보증서를 써줬다면 보상받을 금액도 대폭 준다.
정성진 부땡톡 대표는 “피해를 대신 보장한다는 내용의 보증서는 공인중개사 개인에게도 굉장히 위험한 것”이라며 “금융기관 보증서도 못 믿을 때가 많은데 개인이 준 민간보증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민사소송을 제기하면 이길 수 있겠지만 돈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현행 공인중개법상 최소 자격정지 기준은 벌금형 이상이다. 그러나 최종 상급심에서 선고가 나오기까지 최소 1년에서 길게는 3년까지 걸려 불법행위를 이어갈 여지를 남겨뒀다.
국토교통부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강대식 의원(국민의힘)에게 제출한 ‘시도별 공인중개사 행정처분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행정처분 1만1477건 중 대부분(89%·1만214건)은 과태료 또는 경고 시정 등 경징계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대해 협회는 공인중개사가 임대인에 대한 세금 체납 등 정보에 접근할 수 없을뿐더러 개인정보법으로 막혀 있는 탓에 전세사기인지, 정상적 거래인지를 현장에서 골라낼 수 없다고 해명한다.
공인중개사협회는 “법정단체 승격을 통해 기초적인 조사나 단속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다면 부정행위 제보가 들어와도 아무런 제재를 할 수 없다”며 “법정단체 승격 시 내부 규율을 통한 자정 활동도 가능해 불법 공인중개사 활동에 대한 제재도 쉬워진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공인중개사에 대한 권한 확대도 필요하지만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 질을 높이고 동시에 책임을 강화하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진형 경인여대 교수는 “역전세와 빌라왕 사건을 막고 재발방지를 위해선 부동산 정보 불균형 해소가 필요한데 이는 공인중개사의 중요한 역할이자 책입”이라며 “역할의 중대성을 따져 이에 대한 처벌 규정을 강화하는 등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국토교통부는 다음달말까지 전세사기 피해 관련 기획 조사를 진행한다. 이와 관련해 현재까지 93명을 수사의뢰했다.
이번 조사 대상은 전세거래량 급증 시기인 2020년 1월~지난해 12월 거래신고 된 빌라, 오피스텔, 저가 아파트 중 의심거래 약 2000건이다. 이른바 ‘건축왕’과 ‘빌라왕’ 사건이 발생한 인천 미추홀구와 서울 강서구를 중심으로 전국 18개 구, 29개 동을 특정했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이번 기획조사 이후에도 그 외의 지역과 신규 거래 건에 대해 데이터 기반 분석으로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철저한 조사를 실시할 것”이라면서 “전세사기가 확실시되는 경우 경찰청과 지자체에 수사의뢰나 통보 등 조치가 신속히 이뤄지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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