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더] 리더십 시험대 오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 ‘뚝심’의 연금 개혁·‘친중 논란’ 자율외교…국내외 도전 성공할까
‘갖은 욕을 먹었지만 목표한 바는 성취했다.’ 지난 몇 달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국내외 행보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4월 15일(이하 현지시각) 연금 수령을 위한 법정 은퇴 연령(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는 ‘프랑스 연금개혁법’이 정식 공포됐다. 프랑스 헌법위원회로부터 합헌(合憲) 결정을 받은 지 불과 수 시간 만이다. 법안은 이르면 9월 1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이로써 마크롱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올 1월부터 야당 및 국민과 힘겨루기를 벌여왔던 연금개혁법을 본인의 뜻대로 마무리 지었다.
최근 마크롱의 방중(訪中) 외교 역시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회동을 위해 중국을 방문한 마크롱은 중국을 견제해 줄 것이라 예상한 서방 세계의 기대와는 달리, “중국과 서방 세계를 분리해선 안 된다”라며 중국 편을 드는 듯한 발언을 하는가 하면, 대만 문제에 대해선 “유럽 일이 아니다”라며 관여하지 않으려는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마크롱의 태도는 유럽 각국과 미국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거침없는 발언으로 유명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는 “마크롱이 시진핑의 엉덩이에 키스하고 왔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마크롱은 프랑스 에어버스 항공기 160대와 헬리콥터 50대 , 알스톰의 각종 산업 장비 등 수십조원대 규모의 수출 계약, 해외 풍력발전 프로젝트 협력 계약 등 중국으로부터 푸짐한 선물꾸러미를 받고 귀국할 수 있었다.
정치생명 걸고 단행한 연금 개혁
“여론 조사와 국가 이익 중 하나를 택한다면, 후자를 택하겠다.”
마크롱은 지난 3월 프랑스 언론과 인터뷰에서 연금 개혁을 강행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사실 프랑스의 연금은 고질적인 재정 적자의 원인이었다. 프랑스인의 기대 수명은 2019년 기준 82.5세로, 연금 개혁 전 수령 나이인 62세를 기준으로 하면 퇴직자들은 은퇴 후 평균 20년간 연금을 수령한다. 이는 독일(15년), 이탈리아(17년), 스페인(18년)보다도 훨씬 길다. 또한 고령화로 인해 연금을 받을 사람은 늘어나는데, 연금 재정에 기여할 사람은 줄어든다는 점도 문제로 작용했다. 프랑스 정부에 따르면, 연금 수혜자 1명당 연금 기여자가 1960년엔 4명이었지만, 2022년엔 1.7명, 2040년엔 1.5명이 될 전망이다.
사실 마크롱은 2019년에도 연금 개혁에 나섰다가 강경하기로 이름 높은 프랑스 노조의 반발에 부딪혀 실패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엔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프랑스 연금자문위원회(COR) 추계에 따르면, 프랑스 연금 재정은 올해부터 18억유로(약 2조5900억원) 적자로 돌아설 전망이기 때문이다. 이는 2030년 135억유로(19조4300억원) 적자, 2050년엔 439억유로(63조1852억원) 적자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프랑스 국민 70%가 연금 개혁에 반대한다는 여론 조사가 계속 나오는 상황에서도 마크롱이 고집을 꺾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일각에선 마크롱이 연금 개혁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만큼 실패하더라도 정치생명에 위험이 따르니 실패를 무릅쓰고 한바탕 격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마크롱은 연금개혁법이 통과되기까지 뚝심뿐 아니라 발 빠른 행동력까지 보였다. 4월 14일 밤늦게 위헌 결정이 난 6개 조항을 삭제한 연금개혁법안에 서명한 뒤 즉시 공포를 지시했다. 법안은 4월 15일 새벽 전자 관보를 통해 게재돼 공포 절차를 마쳤다. 일간 르 피가로는 “마크롱이 (1~2일의 시간을 두는) 관례를 깨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법안에 서명했다”면서 “속전속결로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고 분석했다.
‘추종자’ ‘속국’ 발언…전략적 자율성 추구
마크롱이 연금 개혁으로 자국에서 수많은 적(敵)을 만들었다면, 중국 방문 전후에 쏟아놓은 그의 직설적인 발언은 국외에서 프랑스의 전통적인 우방들을 분노하게 했다.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마크롱은 ‘폴리티코’ 등 해외 언론과 인터뷰에서 “최악의 상황은 유럽이 추종자(follower)가 돼 미국의 장단과 중국의 과잉 대응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라면서, “두 초강대국(미·중) 사이 긴장이 고조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을 구축할 시간이나 재원도 갖추지 못한 채 미국에 종속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국빈 자격으로 방문한 네덜란드에선 네덜란드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 뒤 “(미국의) 동맹(ally)이 된다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권리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면서 “동맹이 속국(vassal)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유럽과 미국 간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상황에서 마크롱의 이 같은 발언은 유럽연합(EU)과 미국을 포함한 안보 동맹국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심지어 미국에선 유럽 주요국인 프랑스가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문제를 유럽에 맡겨두고 미국이 손을 떼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마르코 루비오 미 연방 상원의원은 “우리(미국)는 중국이 제기하는 위협과 대만 문제에 집중할 테니 우크라이나와 유럽은 당신들이 알아서 해야 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에 대해 영국 가디언은 “마크롱은 ‘우리 유럽인은(we Europeans)’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대변하는 것은 프랑스일 뿐 유럽이 아니다”라며 프랑스와 선을 긋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마크롱의 독자적 외교 행보에 대해 “유럽 경제는 중국 시장이 절실히 필요하고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은 마크롱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목표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마크롱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 중심 체제로부터 독립을 주장한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의 ‘드골주의’를 걷길 원한다는 추측도 있다. 드골 전 대통령은 냉전이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전략적 자주성을 주장하며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탈퇴하고 중국과의 외교를 수립한 인물이다. 장 피에르·카베스탄 홍콩침례대 정치학 교수는 NYT에 “중국과 미국의 냉전이 심화하는 과정에서 마크롱은 (유럽의) 대세를 거스르고자 하는 의도를 확실히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개혁과 바꾼 지지율, 극우 세력 기반 넓히나
마크롱은 독자적인 대내외 행보로 현재까지는 일정 부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우선 야당과 노동 단체의 거센 반발부터 잠재워야 한다. 강성 노동총동맹(CGT)은 “연금개혁법 무력화를 위한 총력 투쟁에 나서겠다”며, “마크롱은 프랑스에 대혼란을 초래한 인물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 8개 노동 단체는 연금개혁법 공포 후 긴급 회동을 열고 5월 1일 대규모 반대 집회를 열기로 결의했다.
더 큰 위험은 연금 개혁 때문에 인기가 떨어진 마크롱이 극우 성향 대선 후보에게 자리를 내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여론 조사기관 입소스가 4월 12일 주간지 ‘르 푸앙’에 발표한 마크롱의 4월 지지율은 28%로, 올해 초보다 10%포인트 떨어졌다. 이로써 수혜를 본 정치인이 지난 2017년과 2022년 대선 결선에서 마크롱과 맞붙은 극우 성향의 마리 르펜 RN 의원이다. 같은 조사에서 르펜 의원은 지지율이 한 달 사이 4%포인트 상승한 39%를 기록해 지지율 조사 대상에 포함된 이래 역대 최고 지지율을 기록했다. 연금 개혁 반대 시위를 주도하는 CGT를 이끌고 있는 소피 비네 사무총장은 지역 일간 르 프로그레와 인터뷰에서 “마크롱은 연금 개혁을 위해 당선된 게 아니라, RN을 막기 위해 당선된 것인데 지금 정반대로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마크롱의 ‘전략적 자율성’ 역시 유럽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마크롱의 발언으로 유럽에 대한 미국의 안보력을 감축시키려 했던 미국 정치인들이 고무될 것”이라면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마크롱에게 전화를 걸어 ‘트럼프 전 대통령을 재선시키려고 하느냐’고 따져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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