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건축 세계 <3> 업(UP)] 건축을 기억하는 방법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2023. 5. 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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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업(UP)’. 사진 네이버 영화

2009년 개봉한 피트 닥터와 밥 피터슨 감독의 픽사 애니메이션 ‘업(UP)’은 모험을 동경하던 수줍은 소년 칼과 말괄량이 엘리의 유년 시절부터 시작한다. 소꿉친구 둘은 함께 미지의 땅인 ‘파라다이스 폭포’로 모험을 꿈꾸며 성장하고, 인생의 동반자가 된다. 부부는 모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저금하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저금통을 깨기 일쑤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험의 꿈은 희미해지고, 백발의 노인이 된 둘 중 엘리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어느 날, 홀로 남겨져 무기력한 삶을 살던 칼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살던 집이 팔리고 양로원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아내 엘리와 세웠던 꿈을 상기하고, 소중한 집과 아내와 약속, 둘 모두를 지키기 위한 중대한 결심을 한다. 그리고, 2만 개의 헬륨 풍선을 매달아 집을 공중에 띄워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하는 모험을 떠난다.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바젤 사무소 건축가, 서울대 건축학과 출강

기억을 저장하고 이어가는 건축

칼이 획기적인 방법까지 동원해 집을 지키고자 한 이유는 분명하다. 영화의 도입부는 마이클 저키노가 작곡한 ‘결혼생활(Married Life)’을 바탕으로, 칼과 엘리의 일생을 함축해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이 장면은 개봉 당시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5분’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여기에서 집은 두 사람의 결혼, 임신 실패, 회복, 이별 등 삶의 모든 순간을 목격하고 담아낸다.

집은 칼에게 엘리와 함께한 모든 기억의 저장소이자 그녀의 표상이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칼이 집을 엘리라고 부르며 대화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칼은 우산처럼 머리 위에 떠 있는 집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비를 안 맞게 해줘서 고마워. 엘리.” 내면에 쌓인 기억을 통해 건축이 새로운 의미를 갖는 순간이다.

시간 흐름 따라 상호작용하는 건축

모든 건축은 기억을 담는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오래된 건축을 보존하거나 리모델링하는 작업은 이러한 건축의 근본적인 특성에 기인한다. 우리는 건축을 기억함으로써 그에 내재된 시간을 현재로 연장해 이어간다. 현재의 경험은 새로운 기억을 생성하고, 건축 속에 다시 저장된다. 시간은 기억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시간이 지속하는 한 건축과 기억의 상호작용은 계속해서 순환하며 일어난다.

힐 하우스 박스. 사진 카모디 그로아크

건축과 기억의 단절을 피하기 위한 실험

스코틀랜드의 헬렌스버러 언덕 위에 있는 ‘힐 하우스(The Hill House)’는 반투명한 박스 속에서 우아한 저택의 실루엣을 드러낸다. 1902년 완공된 이 집은 아르누보 건축가 찰스 레니 매킨토시가 설계했다. 외관부터 실내 가구까지 건축가가 직접 모든 요소를 디자인한 총체적 예술 작품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연평균 193일간, 비바람이 부는 헬렌스버러의 날씨에 100여 년 넘게 노출되면서 심각한 누수 문제에 직면했다. 보수와 복원에 예상되는 15년의 기간은 이 역사적인 건축물이 오랜 시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질 위기를 초래했다. 통상적으로 건축물 보존 과정 동안 가림막을 설치하고 결국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때문이다.

2017년 런던의 건축 설계 회사 칼모디 그로아케(Carmody Groarke)는 이러한 건축과 기억의 단절 문제에 대한 실험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재활용이 가능한 가벼운 재료로 보호 박스를 설치하고, 힐 하우스를 임시 박물관으로 활용하자는 제안이었다.

아연 도금 금속 지붕은 비를 막고, 벌 등의 곤충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투과성이 높은 금속 메시 벽은 공기 순환을 가능하게 해 비에 젖은 저택을 위한 건조실 역할을 한다. 보호 박스 내부에는 세 개 층의 힐 하우스 외관을 입체적으로 둘러싼 관람 통로를 설치했다. 방문객은 이 통로를 따라 지붕 위를 가로지르는 15m 위의 고가 산책로에 이르면서 매킨토시의 걸작을 상하좌우 모든 지점에서 감상할 수 있다. 21세기형 가벼운 구조물과 지난 세기의 기념비적 건축물,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유람하는 경험자의 모습은 건축에 내재된 기억과 미래의 기억이 현재에서 이어져 중첩된 풍경이다.

카리타스 정신과 센터. 사진 드 빌더 빈크 타일류

기억에 대한 감각과 공간의 느슨함

‘카리타스 정신과 센터(PC Caritas)’ 캠퍼스는 1908년부터 벨기에 멜레 외곽의 숲속에 자리 잡았다. 현대에 이르러 노후된 건물 일부를 철거하던 중 석면으로 인해 한 건물의 철거가 중단됐다. 병원 경영진은 이 건물에 어떤 조치를 취할지 재고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공모했다. 핵심은 오래된 건물을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고, 공공장소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당선자인 벨기에 건축가 그룹 드 빌더 빈크 타일류(De Vylder Vinck Taillieu)의 제안은 단순했다. 그들은 느슨함과 열림 그리고 모호함의 개념을 내세웠다. 2017년 새롭게 완공된 3층 높이의 벽돌 건물은 모든 것이 체계적으로 결정되는 일반적인 리모델링 프로젝트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우선 대부분의 창호와 지붕 일부가 삭제되고, 비와 바람이 관통하면서 건축물 내부와 외부 경계가 모호해진다. 마감재가 제거된 내부와 자갈이 깔린 바닥은 건물의 ‘비어 있음(emptiness)’을 강조한다. 건물 안쪽으로 나무와 화초가 들어오고 가로등이 설치된다. 구조 보강을 위한 새로운 철제 부재와 층마다 삽입된 유리 온실은 기존 구조물과 낯설게 재료의 병치를 이룬다. 각 공간은 ‘정해진 기능 없음’으로 인해 모든 활동에 열리게 된다. 이 같은 방법으로 설계자는 역사적 건축물을 수직의 공원 같은 느슨한 공간으로 변환했다.

공간의 느슨함은 경험자의 모든 감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건축의 시간과 기억에 대한 감각도 동일하다. 몇몇 리모델링 건축물에서 과거의 흔적이 생기 없는 박제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느슨함의 부재 때문일지도 모른다. ‘카리타스 정신과 센터’는 ‘자유공간(Freespace)’을 주제로 한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 은사자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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