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의 글이 되는 음악] 한국 포크의 탄생…김민기 자작곡 ‘친구’가 던진 충격
얼마 전 코로나19에 걸렸다.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시기도 무사히 넘겼건만 뒷북을 쳤다. 또 하나 뒷북이 있다. 식물 키우기에 빠졌다. 오디오 근처까지 식물이 가득 찼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어쿠스틱 음악을 많이 틀어 놓게 됐다. 이 역시 뒷북이다. 코로나19 시기, 집에만 있게 된 사람들은 오디오를 샀다. 한국 주거 환경 탓에 시끄러운 음악보다는 역시 어쿠스틱 음악 수요가 늘었다. 그래서 어쿠스틱 기타 매출이 뛰었다. 팬데믹은 끝났지만 여전히 음악계에서는 포크 싱어송라이터가 대세다. 아니, 통기타가 우리 곁에 없었던 적은 없었다. 한국 포크의 탄생 그 순간부터. 자, 그 순간은 언제 어디에 있었을까.
흔히는 1960년대 명동에 있었던 ‘쎄시봉’으로 알려져 있다. 이장희, 윤형주, 송창식, 조영남 등이 청춘을 보냈던 곳이다. 1950년대 초반, DJ가 신청곡을 틀어주는 음악감상실로 시작, 1964년 무렵 ‘대학생의 밤’이라는 이름의 라이브 무대가 생기며 공연 문화가 자라난 곳이다. 물론 당시 도시 청년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어쿠스틱 기타가 주된 악기였다. 다만 쎄시봉이 배출한 윤형주, 송창식, 조영남 등은 자작곡을 부르지 않았다. 다들 그랬다. 팝송을 그대로 부르거나 가사만 한국어로 번안해 불렀다. 모두 당연하게 여겼다. 스스로 곡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트윈폴리오의 ‘웨딩 케이크’도 번안곡이다. 쎄시봉은 1969년 5월 2일 문을 닫았다. 청년들이 갈 곳도 사라졌다. 같은 해 8월, MBC TV가 개국했고 미국에서는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개최됐다.
1년이 지났다. 1970년 6월 명동 YWCA에 ‘청개구리’라는 공간이 문을 열었다. 직원 식당을 개조해 ‘갈 곳 없는 젊은이들의 쉼터’라는 슬로건과 함께 시작됐다. (후일 YWCA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김은경 간사를 주축으로 YWCA의 젊은 직원들이 주도한 프로젝트다. 음악평론가 이백천, CBS PD 최경식을 비롯하여 각계각층의 문화계 인사가 개관을 도왔다. 초기에는 ‘와이틴’으로 불리던 YWCA 고등학생 회원이 주로 모였지만 대학생도 종종 갔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시설이라 불릴 만한 변변한 무엇은 없었다. 바닥에는 푸른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입장하는 사람들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다. 별도의 음향 기기와 조명은 없었다. 앰프도 마이크도 없는 말 그대로의 ‘생음악’이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매주 수요일 시 낭송, 토론, 노래 부르기 같은 이벤트가 열렸다. 연극배우 박정자도 초기부터 무대에 섰다. 누구나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었다. 이백천, 최경식 같은 음악방송 관계자들과 연줄로 송창식, 윤형주, 서유석, 어니언스, 라나에스포 같은 당대 스타들도 가끔 공연했다. 프로와 아마를 넘나드는, 청년 문화의 집결지였다.
서울대 미술대학 신입생이던 김민기도 청개구리를 자주 찾았다. 어릴 때부터 독학한 클래식 기타 솜씨로 인기가 꽤 많았다. 밥 딜런, 피터 폴 앤드 메리의 노래를 자주 불렀다. 청개구리 탄생의 주역 중 한 명은 음악평론가이자 CBS PD였던 이백천이다. 그는 청개구리에 모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종종 강연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김민기가 이백천 바로 앞에서 강연을 듣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엘리트는 말에 종종 영어를 섞어 썼다. 그런 이백천에게 혈기 왕성한 청년 김민기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에이, 영어 아니면 말 못 하나.” 둘의 나이 차이는 열여덟 살이었다. 밥 딜런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를 부르는 김민기에게 이백천은 말했다. “에이, 영어 노래 아니면 노래할 게 없나.”
다시 2주일이 지났다. 김민기가 청개구리에 나타나 기타를 잡았다. 이백천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앰프도, 마이크도 없이 김민기는 노래를 시작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가 고3 때인 1968년, 친구 동생의 사고사 소식을 듣고 만든 노래 ‘친구’였다. 혼자만 갖고 있다 2년 만에 처음으로 남들 앞에서 불렀다. 팝송만이 전부인 줄 알았던 청개구리의 학생들 그리고 관계자들, 모두 충격을 받았다. 이 ‘자작곡’의 여진은 다른 이에게도 퍼져나갔다. 송창식, 서유석 같은, 다운타운과 방송계를 넘나들던 기존 가수들도 이에 영향받아 자작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 싱어송라이터 문화의 조용하고 강렬한 시작이었다.
양희은과 청개구리의 인연 또한 각별하다. 양희은이 청개구리를 찾은 건 1970년 늦여름, 재수생 때였다. 이곳을 찾은 첫날에 대해 양희은이 에세이집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서울대 미대생 두 사람이 통기타를 메고 스테이지에 올라섰다. 둘 다 장발이었다. (중략) 그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라 했다. ‘도깨비 두 마리’의 준말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한 사람은 미소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에 비하면 못났다. 그런데 그 못난 사람의 눈빛이 아주 빛났기 때문에 인상적이었다. 조명 쪽으로 고개를 쳐들고 노래를 했는데 조명 탓인지 눈빛이 더욱 빛나 보였다. 그가 김민기였다.”
공교롭게도 도비두 공연 직후 양희은은 무대에 올라야 했다. 함께 간 친구가 학교 다닐 때 가장 노래를 잘한 친구라며 사회자에게 양희은을 추천한 것이다. 양희은은 서유석의 기타 반주에 맞춰 매트 먼로의 ‘Wednesday’s Child’와 비틀스의 ‘Yesterday’를 불렀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얼마 후, 양희은은 최경식의 연락을 받고 CBS 스튜디오에서 두 곡의 팝송을 녹음했다. 그해 가을, 라디오를 통해 스무 살 양희은의 목소리가 흘렀다. 입시를 준비하는 재수생 신분임에도 양희은의 인기는 높았고, 마침내 1971년 2월 대학 합격 기념 겸 수험을 도왔던 친구들에게 보은하는 의미로 청개구리에서 첫 리사이틀을 했다. 반주는 청개구리에서 가장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 맡았다. 김민기였다.
1970년대 청춘 음악가들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제작된다면, 1순위로 꼽고 싶을 만큼 많은 에피소드와 이야기를 낳은 청개구리는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새로운 세대(베이비 붐 세대)의 욕망이 있었고, 재능이 태어났다. 동참하기 위해, 구경하기 위해, 발견하기 위해, 각자의 이유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모였다. 안전사고라는 개념도 없는 시절이었지만 언제 사고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청개구리는 꽉꽉 들어찼다. 그때의 ‘어른들’이 늘 그랬듯 YWCA의 어른들 또한 위험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청개구리를 없애는 선택을 했다. 허무하고 급작스러운 종결이었다. 몇 장의 사진과 증언이 그 짧지만 중요했던 시간을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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