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계 미투 그 후···‘일상에서 사라진’ 피해자를 일으키다
고발 후 떠나는 피해자들 회복 위해
성폭력 피해자·연대자가 직접 만든 프로그램
몸과 마음의 회복 노력···3년간 활동 담은 다큐도 준비
성폭력 피해생존자에게 필요한 치유 활동을 생존자가 직접 기획해보자는 의도에서 시작했습니다. 성폭력 예방교육이나 제도적 지원은 진전이 있었지만, 피해자가 예술계를 떠나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남은 숙제였어요. 생존자들이 함께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회복에 필요한 자원을 탐구하고, 사회적으로 연결된 감각을 회복하는 과정이 되길 바랐어요.
- 자청
2016년 ‘#○○계 성폭력’ 고발운동, 2018년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폭로로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미투 운동’ 이후 7년이 지났다.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라는 슬로건처럼 일부 가해자들이 사법적 처벌을 받았지만, “피해자는 일상으로”는 아직도 요원하다. 예술계에서도 ‘거장’ 또는 ‘위대한 예술가’로 불렸던 이들이 성폭력 가해자로 드러나 충격을 던졌다. 폐허가 된 현장은 하나씩 복구되었지만, 그 자리에 피해자들은 없었다. ‘상-여자의 착지술’ 팀은 묻는다. “고발이 지나간 뒤 피해생존자들에겐 무엇이 남았는가?”
‘상-여자의 착지술’은 미술·무용·영화·출판·공연·만화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계에서 활동하며 성폭력 피해를 입었거나, 피해자들에게 연대했던 이들이 함께 만든 ‘일상 회복 프로그램’이다. 자청, 마밍, 나무늘보, 라무, 탁, 늘, 구구 등 7명이 함께 기획해 성폭력 피해자들을 상대로 진행한 공공예술 프로젝트다. 2020년 시작해 3년 동안 시행된 프로젝트를 일단락하며 기획자·참여자 등이 함께 쓴 책 <여자를 일으키는 여자들>(허사이트)이 출간됐다.
참여자들이 둘러앉아 자신의 몸을 그려보며 몸의 감각, 고통을 시각화한다. 상대방과의 안전한 경계와 거리를 스스로 가늠해보며 ‘내가 안전한 공간’을 주체적으로 설정해본다. 과거의 나의 사진 사이를 걸어보며 성폭력 피해로 인해 단절되고 조각난 나를 회복하는 시간을 가진다. 내 몸이 나무가 되어 서로가 서로의 매트리스가 되어 쓰러지는 이를 안전하고 부드럽게 받쳐준다. 피해생존자들이 서로의 몸을 안전하게 부딪치고, 마음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던 서울 마포구의 ‘댄서스라운지’에서 지난달 24일 자청, 마밍, 나무늘보, 늘, 탁 등 5명을 만났다. 한낮의 햇빛이 은은하게 드리운 공간에서 생존자들은 움츠러든 몸과 마음을 조금씩 움직여보며 ‘가동성’을 시험하고 탐구했을 것이다.
‘상(上)여자’는 성폭력 피해생존자, 연대자들이 서로에게 ‘엄지 척’을 날려주며 응원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착지술’은 트라우마 치유 기법의 하나인 ‘그라운딩’에서 따왔다. 무용계 성폭력 사건에 연대하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마밍과 늘보가 ‘애프터 미투’에 대해 고민하며 시작됐다. 미술·무용·영화 등 다양한 예술장르가 통합된 프로그램을 함께 개발했다.
“그라운딩은 폭력이 일어났던 것은 과거의 일이며 지금은 안전한 곳에 있다고 온몸으로 상기하는 것을 의미해요. 자신의 속도대로 회복하고 스스로 원할 때 속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안전한 바닥’을 만들고자 했어요. 땅에 제대로 서 있고 제대로 걸어가는 과정은 많은 연습과 시간을 필요로 해요.”(마밍)
성폭력 피해자는 다른 시간대를 살아간다. 현재를 살면서도 어떤 자극이나 경험을 계기로 피해 당시의 과거로 붙들려 가는 것이다. 자청은 “성폭력 피해자가 이전과 달리 왜 복잡한 업무에 집중할 수 없는지, 심한 건망증으로 힘들어하는지, 소리와 움직임에 놀라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노동환경에서 피해자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며 “장애인 등 다른 속도를 가진 사람들을 탈각하고 제외하는 식으로 일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출판계 성폭력 피해자인 탁은 자신을 “실험실의 하얀 생쥐”라고 지칭했다. “프로그램이 피해자들에게 안전한지, 트라우마를 건드리거나 주저앉히지 않는지 실험해보는 ‘바로미터’ 같은 존재였죠. 그런데 점차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어요. 처음엔 회의록을 작성하다가, 이젠 회계도 담당하고 있어요. 제가 기획한 ‘대기실로의 서점’도 프로그램에 들어갔죠.”
‘대기실로의 서점’은 탁이 가져온 책들로 서점을 차린 뒤 참여자들이 사회로 나가기 전 서점에서 머물며 미래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프로그램이다. 탁은 “‘상-여자의 착지술’이 저에게 대기실인 것 같다”며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노동자성을 회복하고 있으며 다시 일어날 발판이 되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몸’은 프로젝트의 핵심 키워드다. 늘보는 “트라우마가 심리적이기도 하지만 빠르게 반응하는 건 몸이다. 무용심리치료사인 라무와 함께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빼앗긴 신체주권, 감정주권을 다시 세우는 게 큰 목표였다”고 말했다. 많은 호응을 얻은 것은 상대방을 믿고 마음껏 쓰러지는 프로그램이다. “한 사람이 나무가 되고 서로가 서로의 매트리스가 되어 지지를 해주는 프로그램이죠.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서로를 들어 올려주는 것이죠.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강력한 발언인 셈입니다. 무용치료 기법을 가져와 변용했는데, 참여자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늘)
‘상-여자의 착지술’은 서울을 시작으로 부산, 전주에서 총 네 차례 진행됐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단될 위기에 처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진행한 결과 3년이나 이어질 수 있었다. ‘상-여자의 착지술’ 팀은 피해당사자를 대상으로 한 회복 프로그램에서 나아가 앞으로 2년 동안 일반인을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늘보는 “궁극적 목표는 상시적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자조’로 시작한 일이 서로를 돕고, 남을 돕는 일이 되었다. 마밍은 프로젝트 기획과 시행 과정을 촬영해 <착지연습>이란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할 예정이다. 마밍은 <버블 패밀리>로 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지만, 영화계 성폭력 피해생존자로서 트라우마와 고통에 시달려왔다. 마밍은 “독립영화계는 공동체 규모가 작다 보니 성폭력 사건을 내부에서 해결하다가 많이 소진되고 있다”고 말했다. 탁은 “서로 지켜주는 일과 삶이 연계된 경험이었다. 가망 없다 생각했던 인생 속에 가망 있음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을 잘 만났다”고 말했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각자 작품활동을 해가고 있죠. 작품과 연대가 함께 진행 중인 거죠. 서로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 연대, 다음의 연대가 나아갈 방향이 아닐까요.
- 늘보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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