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어 점자책 교육, 한국 3D 프린터 덕분에 가능” [키르기스스탄의 봄]

2023. 5. 1. 11:1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어 점자책 대신 모국어 배우게 돼
16세 아미르 군은 ‘3D프린터 의수’ 받아
국립기술대 ‘팹랩 비슈케크’ 지원에 새 삶
키르기스스탄 국립기술대학의 팹랩(Fablab)에서 3D 프린터로 만든 키르기스어로 된 점자판 [비슈케크=최은지 기자·외교부 공동취재단]
키르기스스탄 국립기술대학의 팹랩(Fablab)에서 3D 프린터로 만든 키르기스어로 된 점자판키르기스스탄 국립기술대학의 팹랩(Fablab)에 마련된 3D 프린터. 이 3D 프린터로 의과대 수업 때 활용하는 심장 모형을 만들어 제공하기도 했다. [비슈케크=최은지 기자·외교부 공동취재단]

“이전엔 러시아어로 된 점자교과서만 있었는데 이제 키르기스어 점자교과서를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13일(현지시간)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 국립기술대학(KSTU)의 ‘팹랩 비슈케크(Fablab Bishkek)’ 연구실에서 취재진을 만난 니콜레이 메슈치코 비슈케크시각장애인학교 교사는 현재 30년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에는 비슈케크와 오쉬 두 군데에 시각장애인학교가 있다. 두 학교에는 각각 250명, 150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그동안 점자책은 주로 모스크바에서 받아왔는데 구소련 체제가 무너지고 나서는 점자책 값이 턱없이 올랐다.

키르기스스탄은 러시아어가 공용어이지만 모국어인 키르기스어를 공식어로 사용하고 있다. 모국어를 보존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공식 석상에서는 키르기스어를 사용한다. 슬라브어계에 속하는 러시아어와 달리 키르기스어는 알타이어계에 속한다. 한국어와 어순이 같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은 시각장애인들이 모국어를 배우기는 쉽지 않았다. 점자책이 대부분 러시아어로 돼 있기 때문이다.

투르달리예바 아이잣 키르기스스탄 국립기술대 교수는 몇 년 전 남부도시 오쉬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장애인학교 교장을 만났다. 특히 오쉬는 러시아어보다 키르기스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 교육에 더욱 어려움이 있었다. 오쉬의 장애인학교에서는 점자책이 있는 러시아어를 주로 가르치고, 키르기스어는 칠판에 적어가며 어렵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잣 교수는 “오쉬에서는 주로 키르기스어를 쓰는 사람이 많아 러시아어를 쓰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 키르기스어를 배울 필요성이 더 컸다”며 “팹랩에 와서 기술자와 이야기하다가 3D 프린터를 활용한 아크릴판 점자책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키르기스스탄 정부의 IT산업 육성 진흥정책과 함께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은 IT교육을 전수하고 인재 양성 및 산학 협력 연계 취·창업 지원을 위해 서울국제협력기구와 공동으로 ‘팹랩 비슈케크’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2019년 시행된 1차 사업이 좋은 평가를 받아 현재 2차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3D 프린터장비를 도입하고 교수와 학생,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교육과 함께 취업 지원, 시제품 제작을 지원하고 있다. 키르기스어 점자책은 팹랩의 기술자와 만나 그렇게 시작됐다.

기존에는 1장에 1달러 가격의 두꺼운 종이에 수작업으로 점자를 제작했지만 이제 아크릴판에 일정한 높이의 점자를 만들 수 있게 됐다. 또 3D 프린터로 기하학 수학책도 거뜬하게 만들 수 있다. 찢어지거나 금방 해지는 종이와 달리 아크릴판은 사용기간이 긴 것도 큰 장점이다. 경제적 효과는 물론이다.

술탄가지에바 르노 투르두베코브나 테크랜드 대표는 “여섯 살 때부터 점자를 공부하는데 손가락으로 만질 때 아이들 손이 너무 작아 교육이 어려운 경우도 있었고, 점자의 높이가 같아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며 “우리는 자료를 만들면 오래 썼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해 러시아어로 120개를 제작했고, 키르기스어 20개, 영어 20개를 만들었다”며 “지난해 제작한 점자를 자료로 활용했다”며 “현재 중학교 2학년 기하학 수학책도 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메슈치코 교사는 “점자는 평평한 원래 모양의 글자와 옆에 점자로 두 가지 방식으로 제작돼 학생들은 보통 글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점자로는 어떻게 반영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며 “기하학의 경우 모양이 매우 정확해 시각장애인도 배우기가 쉽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모국어를 가르칠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메슈치코 교사는 “전에는 러시아어로 돼 있어 지방에서 올라온 아이들은 어려워했다”며 “지금은 키르기스어로 돼 있으니 자료를 빨리 습득할 수 있게 됐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팹랩 한쪽에는 3D 프린터로 제작한 갖가지 모형이 전시돼 있었는데, 그중 의수가 눈에 띄었다. 손가락 관절이 정교하게 표현돼 있고 움직임도 자유자재로 가능했다.

열여섯 살인 배스파예브 아미르 군은 열한 살 때 가족이 운영하는 석탄가공공장에서 놀다가 손을 잃었다. 비슈케크의 한 병원에서 의수를 제안받았지만 병원에서도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했고, 이후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끝내 무산됐다.

아미르 군의 모친 빌 라이얍 씨는 적십자를 통해 팹랩에서 근무하는 통역가를 만났다. 팹랩 기술진은 아미르 군과 세 차례 미팅 후 꼭 맞는 의수를 제작했고,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다. 아미르 군은 이제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물건을 자유롭게 집을 수 있게 됐다.

라이얍 씨는 “아이 아빠가 너무 힘들어해 우울증까지 생겼고, 저도 힘들었지만 부모 중 한 명이라도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버텼다”며 “아이에게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니라고, 한 손으로도, 다리가 하나 없이도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고 동기부여를 했다”고 떠올렸다.

아미르 군의 꿈은 프로그래머다. 그는 “나중에 프로그래밍을 하고 싶고, 팹랩에서 프로그래밍과 관련된 교육이 있으면 참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라이얍 씨는 “아들이 일하는 회사도 보고 싶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같이 여행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스무 살 바후디노바 아달리아트 양은 팹랩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핸드백을 만들었고, 실력을 인정받아 일주일 전 한 텍스타일공장에 디자이너로 취업에 성공했다. 팹랩에서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등 프로그램을 배웠다.

아달리아트 양은 “학교에서는 원단을 봉제하는 것을 배웠는데 팹랩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프로그램을 배웠다”며 “옷을 만드는 것에서 나아가 장비에 대해도 지식이 생겼다”고 밝혔다.

그의 꿈은 의류공장 사업가다. 아달리아트 양은 “팹랩은 가족 같은 우호적인 분위기였고, 취업할 때도 기술자님과 상의하고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며 “친구들도 팹랩에서 배우고 싶다고 부러워했다”고 말했다.

비슈케크=최은지 기자·외교부 공동취재단

silverpaper@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