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처럼 나타나 천천히 익다… 하딩의 열매가 기대되는 이유

2023. 5. 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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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베를린필 지휘' 다니엘 하딩, 산타 체칠리아 음악감독으로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지난 3월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 아카데미 음악감독으로 지명된 다니엘 하딩이 극장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Accademia Nazionale di Santa Cecilia

요즘은 젊은 지휘자들의 활동이 낯설지 않지만 2000년대 영국은 사이먼 래틀, 다니엘 하딩, 켄트 나가노, 프란츠 벨저뫼스트, 카를로 리치 등이 등장하며 카라얀, 번스타인으로 대변됐던 지휘자의 평균 연령을 확 낮췄다. 그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은 다니엘 하딩이었다. 클라우스 메켈레가 등장하기 전까지 하딩은 '젊은 지휘자'의 아이콘이었다. 심지어 음악 전공자가 아닌 케임브리지대 1학년생이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부름을 받아 21세에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봉을 잡았다는, 다소 영화 같은 등장은 그를 더 주목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최근 한 유명 사이트에서 '하딩은 아바도와 래틀의 수제자로 혜성같이 등장한 후 특출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다소 정체됐다'고 언급한 문구를 읽게 됐다. 신동이나 젊은 천재 이슈에 대한 관심이 단순하고 어이없는 이유로 제멋대로 소비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구였다. 무엇보다 지휘자는 어느 누구보다 무대 위에서 오랫동안 커리어를 이어갈 사람들인데 그 기나긴 여정의 극히 일부인 한 지점을 '현재'라는 좁은 관점으로 쉽게 판단한 내용이다 싶었다.

하딩은 노르웨이의 트론하임 심포니 음악감독을 시작으로 브레멘 도이체 캄머필하모니, 아바도의 유산인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 2007년부터 현재까지 스웨덴 라디오 심포니의 수장으로서 활동해 왔다. 그런데 지난 3월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 아카데미는 2023-2024 시즌부터 다니엘 하딩이 5년 임기로 음악감독을 맡게 됐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주세페 시노폴리, 다니엘레 가티, 정명훈, 그리고 2005년부터 음악감독을 맡아 왔던 안토니오 파파노 경의 뒤를 이어 산타 체칠리아를 이끌 수석 지휘자 대열에 서게 된 것이다. 16년째 몸담았던 스웨덴 라디오 심포니 음악감독 연임까지 고사했으니, 로마에서의 활동에 집중하려는 것 같다.

지휘자에게 오케스트라는 악기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투영할 수 있는 도화지 같은 오케스트라를 만나는 것은 커리어에서 매우 중요하다. 마리스 얀손스는 바이에른 라디오 심포니와 로열 콘세르트헤바우를 이끌며 유일무이한 기록을 남겼지만 1979년부터 22년간 키워낸 오슬로 필하모닉과 남긴 사운드 역시 특별했다. 군더더기 없는 주법을 지향해 차가운 듯하지만 그 온도를 뚫고 나오는 따스한 음색이 더없이 풍부한 반전의 감수성을 표현해 왔다. 첼리비다케 이후 주목받지 못했던 슈투트가르트 오케스트라가 로저 노링턴을 만나 일으킨 화학적 반응은 '슈투트가르트 사운드'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그들만의 개성과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다. 실제 이들의 공연 리허설을 들으면서 마주했던 청량함은 모던 악기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주법이 어디까지 담백해질 수 있는지, 교향곡 해석은 얼마나 디테일한 부분에서 다른 시도를 통해 사운드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 환기시켜주었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세계적 수준의 앙상블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휘자만의 강점인 레퍼토리, 특유의 사운드로 그들만의 정체성을 갖게 될 때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다니엘 하딩은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등 최고의 악단이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를 맡겨 온 인물이다. 세상 그 누구보다 빠르게 최고의 위치에서 지휘자 인생을 살기 시작한 그에게는, 최고 악단의 상임을 맡아 빨리 소진되기보다는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긴 호흡을 갖고 연주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일 수 있다. 하딩의 음악적 아버지이자 멘토였던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사이먼 래틀, 두 사람이 베를린 필하모닉과 어떤 관계를 이어가며 그들의 재임 기간을 마무리했는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영향이 없을 수 없다. 그 때문인지 하딩은 어떤 레퍼토리에서든 이슈화될 정도로 개성을 반영하는 일에 거리를 두고 있다. 그렇지만 모차르트에서 쇤베르크까지 어떤 레퍼토리를 맡겨도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내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신뢰감을 주는 지휘자다.

이제 관건은 산타 체칠리아에서의 여정이다. 하딩은 선임이었던 파파노만큼 오페라를 많이 연주하진 않았지만 엑상 프로방스 페스티벌이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모차르트 '돈 조반니' 해석만큼은 손에 꼽을 명연,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2024년 시즌은 푸치니 사후 100주기를 맞아 '토스카'를 무대에 올리고 베르디의 '레퀴엠'과 어느새 그의 장기가 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말러, 바그너 등을 연주하며 임기를 시작한다. 도이치 그라모폰과 하딩, 산타 체칠리아 간의 앨범 발매도 계획돼 있는데 영리하면서도 실력과 자유로운 사고를 갖춘 이 지휘자가 산타 체칠리아와 어떤 음악으로 자신의 열매를 키워갈지 매우 궁금해진다.

다니엘 하딩의 2016년 연주 모습. ©Musacchio & Ianniello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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