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유동성 공급이 시장경제에 사과라도 해야할 일 아닌가 [특파원 리포트]

김원장 2023. 5. 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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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준 금리를 냉정하게 올리고 있는 연준이 또 돈을 풀었다. 이건 뭐, 에어컨 틀고 벽난로 켜기도 아니고, 그야말로 냉정과 열정사이다.

연준(Fed) 역할이 아무리 샤워기 온도 조절이라지만, 참 딱하다. 지난달 은행 몇 곳이 쓰러질 조짐을 보이자 연준은 서둘러 4천4백억 달러(580조 원)를 풀었다. 이랬다저랬다 자기들도 쑥스러웠는지 슬그머니 유동성을 공급했고, 그러자 미국 언론은 ‘스텔스 양적완화’란다.

2.

재정이 바닥나자 미 의회는 또 부채한도 상향을 놓고 싸운다. 1960년 이후 78번이나 상향해놓고 또 싸운다. 공화당은 정부가 내년 재정 지출을 크게 줄이지 않으면 어깃장을 놓을 태세다. 미국은 내년 11월 대선이다. 공화당 입장에선 바이든의 각종 보조금 지갑을 닫아야 한다. 행여 합의가 안 되면 미국은 '디폴트'다. 그럴리 없지만.

기축통화국 미국 정부가 돈을 떼먹을 수 있다는 소식에 미국 국채 신용디폴트스와프(CDS) 프리미엄이 튀어 오른다(CDS는 남의 집에 불이 나면 내가 보험금을 타는 구조다. 남의 집이 위험해질수록 수익률이 오른다). '무위험자산'이라는 미 국채가 위험해 질 수 있단다. 그럼 위험자산인가 무위험자산인가.

3.

돈이 넘치다보니 잘나가는 기업들이 자꾸 자본금을 털어낸다. 참 희한하다. 증시는 시장경제를 대표하는 발명품이다. 기업의 속살인 장부까지 공개하면 투자자들이 지분을 사들이고 그 돈은 ‘자본금’으로 쌓인다. 잘나가는 기업은 자본금을 늘려(증자) 자꾸 종잣돈을 불려야한다.

그런데 스타벅스도 맥도날드도 자본금 곳간이 텅텅 비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부실기업처럼 보인다. 잉여금 곳간에 돈이 넘치다보니 자본금 이런 거 필요 없다. 자꾸 멀쩡한 주식을 사들여 소각한다. 자본금이 줄면 종잣돈 대비 수익이 자꾸 커지니 ROE(자기자본이익률)가 오른다. 주가가 따라 오른다. 심지어 지구 최대 기업 ‘Apple’도 자본금이 계속 쪼그라든다.

4.

한국의 어떤 기업들은 아예 증시를 스스로 떠나버린다. 돈뭉치 들고 달려드는 사모펀드들이 줄을 잇다보니 주주들이 모아준 돈이 필요 없어졌다. 기업 공개(증시 상장)라는 게 기업의 주인을 수만 명으로 분산시켜 규제도 많고 잔소리도 많다.

이런 간섭이 싫어서 아예 자진해서 상장 폐지하고 사기업으로 돌아간다. 코원부터 맘스터치, 최근엔 오스템임플란트까지, 수많은 기업이 주주들에게 돈을 돌려주고 증시를 떠난다. 시장경제에서 소수의 돈 보따리가 넘치니, 일부 기업은 이제 다수에게 조금씩 투자금을 모을 필요가 없어졌다.

5.

돈이 넘치니 미국의 은행들은 고객의 예금이 썩 반갑지 않다. 기준금리가 5%인데 웰스파고 등 시중은행의 예금 금리는 1% 안팎이다. 이것도 희한한 일이다.

(시장 경제는 고객이 맡긴 돈으로 은행이 직접 투자하지 못하도록 100년 가까이 규제하고 있는데) 은행들은 틈만 나면 돈 벌 궁리를 한다. 파산한 SVB은행은 자산의 절반 이상을 국채에 투자하고 있었다. 갑자기 금리가 급등하면서 국채값은 폭락했고, 그렇게 망했다.

증권사는 주식 거래로, 보험사는 보험 판매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본업이 투자다. 우리 보험사의 부동산 PF 익스포저(까닥 잘못하면 날리는 돈)가 44조 원, 증권사는 28조 원이나 된다(한국은행 2022년 9월). 알고 보니 이들은 아파트 짓는 건설사 대출에 신용보강 해주면서 위험하게 먹고 살고 있었다.

미 연준의 채권 보유량 그래프. 급격한 채권 매입(시중 유동성 공급)으로 한때 9조 5천억 달러까지 치솟았던 연준의 자산 잔고는 지난해 자산 축소(채권 매각으로 시중 유동성 흡수)를 시작한 이후 빠르게 감소했다. 하지만 8조 3천억 달러까지 줄었던 잔고는 다시 은행권 위기가 찾아오면서 8조 7천억 달러로 급등한다. 연준이 다시 돈을 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금융권 불안이 사그라들자 연준은 지난주부터 다시 자산 매각을 재개했다


6.

누굴 탓하랴. 연준(Fed)은 지난 2020년 3월 시중에 돈을 풀면서 급기야 부실기업의 회사채까지 사줬다. 법으로 안되니, 직접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사들였다. 중앙은행은 무딘 칼(blunt knife)로 시장의 중립을 추구하는 기관이다. 그렇게 시중은행을 통해 통화량을 조절하는 게 본업이다. 시장은 오랫동안 그것을 연준의 '위대한 조정(Great Moderation)'이라고 칭송했다.

그런데 무한 통화발행권한을 가진 연준이 부실기업을 맘대로 골라 돈을 쥐여줬다. 이쯤되면 지나친 유동성이 시장경제에 사과라도 해야 할 일 아닌가. 그렇게 희한한 일은 일상이 됐다. 달러를 그토록 찍어냈는데 달러 가치가 치솟고, 경제 위기가 왔는데 돈이 넘친다. 실물경제가 주저앉는데 주가는 급등하고, 기업들은 주가를 올리겠다고 자본금을 덜어낸다. 그렇게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 땀흘려 일하는 사람을 비웃는 시대가 됐다.

7.

1929년 미국은 대공황이 찾아와 은행의 1/3이 망하고 1,5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워런 버핏은 아버지가 직장을 잃은 덕분에 이듬해 자신이 태어났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금융 시스템이 왜 멈춰섰나를 따져보면서 은행의 탈선을 막는 ‘글래스 스티걸법’을 만들었다. 서민들이 집을 살 수 있는 주택융자기관이 생겨났고, 최저임금과 산재보험같은 제도도 모습을 갖췄다. 아동노동에 대한 분명한 규제도 이 무렵 완성됐다. 미국이 최강대국이 된 것은 그때 위기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 반듯하게 고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위기가 찾아오면 그냥 ‘돈’을 푼다. 통화로 풀다가, 재정으로 풀다가, 헬리콥터로 돈을 푼다. 기준금리를 ‘0’으로 끌어내리고, 단기채를 팔고 장기채를 사들이고, 지급준비율을 낮춘다. 사실은 그냥 다 ‘돈 풀기’다.

그렇게 풀린 달러는 지구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자산가치를 올려놓고, 어느 날 썰물처럼 쑥 빠져나가면 가난한 나라들을 또 뒤집어놓는다. 어쩌면 이 근본 없는 돈풀기가 다시 찾아올 위기의 근본 원인은 아닐까.

시중 채권을 사들여 돈을 풀면서 연준 곳간에는 채권이 '9조 달러'나 쌓여있다. 그중 연말까지 '1조 5천억' 달러 정도는 채권을 다시 팔아서 현금을 흡수할 계획이다(이게 사실상 그만큼의 금리 인상효과를 불러 온다). 게다가 미국의 기준 금리는 이미 5%나 된다.

그렇게 빨리 돈을 푼 적도 없지만, 이렇게 빨리 돈을 흡수한 적도 없다. 진공청소기처럼 돈을 흡수하면 누군가는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지구 곳곳에서 아우성이 터져나오면, 연준은 그때도 또 돈풀기 비공을 시연할 것이다. 희한한 일은 더 잦아질 것이다.

김원장 기자 (kim9@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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