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그 너머의 과학사』 존 에이거 “현대 과학의 성취, 시장과 전쟁과 정부에 의해 추동됐다” [김용출의 한권의책]
“학창 시절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아주 굉장한 건축물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깐깐한 선생님 때문에 한참을 쫓겨 올라가야 했던 아주 높은 계단 위에 있는 웅장한 건축물을 기억할 것이다. 아마 애정보다는 차라리 존경에 가까운 감정을 함께 기억할 것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아무리 이상한 유클리드 기하학 명제라 하더라도 그것이 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바보처럼 경멸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 명제가 참이라는 주장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런 자신만만한 확실성은 없어지게 된다. 이 질문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특수 상대성 이론이 성립되기 위해선 자연 법칙이 등속으로 움직이는 기준좌표계에서 동일하게 보여야 하고, 특히 한계 속도인 빛의 속도는 어떤 좌표계에서 측정하더라도 일정하다는 두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은 수도사 같은 고립이나 은거 속에서, 혹은 그의 특허 업무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진 게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히 특허에 근접한 전기기술에 대한 면밀한 검토로부터 촉발된 것이었다. 즉, 그는 시간 좌표화 절차와 기술의 확산을 최전선에서 관찰하고 이해하기에 좋은 스위스 베른의 특허국 사무소 보조 심사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연구 성취는 바로 당시 산업과 기업, 국가와 제국 경영을 위해 좌표화된 시계라는 시대의 요구를 검토하고 반영한 결과였던 셈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뿐만이 아니었다. 뢴트겐의 X선, 퀴리의 방사능,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 멘델 유전 이론의 재발견 등 189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20세기 초반을 수놓은 물리학과 생명과학, 심리학 등 많은 과학들이 당시 기업과 사회, 국가와 정부의 요구에 호응하면서 발전해 갔다.
저자가 과학 발전의 추동력으로 지목한 실행세계는 운송과 통신, 전력과 같은 현대 사회의 필수적 요소뿐 아니라 기업과 시장, 행정과 국가, 전쟁과 군사력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과학이라는 ‘응용세계’의 불빛 뒤에는 실행세계라는 인간사의 풍경이 깊숙이 자리했다는 것이다. 실행세계의 요구는 때론 식민지 시대의 착취나, 전쟁 및 냉전 시기의 군사력 경쟁, 국가 권력이나 기업의 횡포를 낳기도 했다.
저자는 20세기 초반 과학의 지형을 조망한 뒤 제1차 세계대전과 이후 나치 독일 및 소련 등과 민주주의 진영 간 대결로 찢겨진 세계의 과학을 다룬다. 국민과 병사의 건강이 관리대상이 되면서 관련 과학이 동원되고, 과학 기기 및 장치들 역시 점점 커져갔다. 전쟁 수행을 위해 과학자들도 위원회 등의 형태로 조직되고 동원된다.
냉전 시기 과학의 발전과 관련, 저자는 종식 이후 기밀 해제된 사료들을 바탕으로 논의를 풀어간다. 냉전은 우주 연구와 지구물리학, 인터넷을 비롯한 사이버네틱스 등에서 과학간 연대의 틀을 형성하는 등 ‘거대과학’의 시대를 활짝 열었고, 동시대 과학자들의 보안의식을 비롯한 정신 상태와 연구 활동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특히 한국전쟁 역시 미국 과학의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모습도 인상적이다. 한국전쟁 기간 트루먼과 맥아더간 원자폭탄 사용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지면서 원자폭탄의 사용 문제가 제기됐다. 아울러 미국 내에선 과학을 군사체계 안에서 좀더 전면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고, 저자는 역사가 대니얼 케블스의 분석을 인용한다.
책은 사회적 맥락이 탈락된 ‘내적 접근’에 집중했던 기존 과학사 서술과 크게 다르다. 20세기 과학사의 성취를 과학 내적인 논리와 함께 시장과 기업, 전쟁과 행정 등의 실행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풍성한 풍경의 과학사를 보여준다.
“나는 실행세계, 즉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인간 프로젝트들의 투기장이 20세기 과학사 대부분을 이해하는 배경이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좋은 과학은 실행세계 상황을 표상하는 추상적이고 단순화된 모형들을 측정하고, 비교하고, 경합하는 방식으로 수행됐다.”
책은 단순한 팩트와 스토리의 나열에 그치는 대다수 자연과학 서적과 달리 20세기 현대 과학의 성취와 이야기를 유려한 문장과 필치로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과학적 성취의 1차 사료 인용이 부족한 건 다소 아쉽지만, 그럼에도 과학적 성취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엔 지장이 없어 보인다. 세계를 이끄는 주요국의 20세기 과학 발전 특징이나 경향도 간결하게 녹여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원제는 Science in the 20th Century and Beyond.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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