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시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의 의미

박철화 2023. 5. 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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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화 문학평론가

할아버지는 20세기 초 봉건 조선의 신민으로 태어나 식민지 시대를 살고 근대국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1970년대 중반 돌아가셨다. 한마디로 옛날 사람이었다. 평생 한복을 입고 살면서, 그 한복이 상징하는 세계 바깥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분이었다. 그렇다고 대단한 유교적 교양을 지닌 것도 아니어서 그냥 한문으로 된 글줄을 깨우친 정도의 끄트머리 지방 유생이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놀고 있으면, 예외 없이 그 친구의 집안을 물으며, 양반 출신이 아니니 앞으론 어울리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국민학교 학생이었던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고 어리둥절했다. 재미있는 친구와 왜 어울리지 말아야 하나?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는 갑자기 내게 한자 몇개를 써보이시며 글자의 뜻을 물어오셨는데, 내가 전혀 답을 못하자, 퇴근한 아버지에게 역정을 내며 아이를 바보로 키웠다고 혀를 끌끌 차셨다. 그때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들께 꽤 똑똑하다고 평가를 받던 때라 할아버지의 그런 반응이 이상했다.

올해로 아흔 목전의 아버지는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대한민국의 공무원 생활을 하고 은퇴한 분이다. 한문을 대충 읽고 쓸 줄은 아시나, 농업고등학교까지 근대 교육을 받고 평생 공직에 계셨던 터라 옛날 사람은 아니다. 할아버지가 나의 한문교육에 대해 힐난하셨을 때, 말대꾸 한마디 않고 무릎 꿇은 채 고스란히 혼나긴 했지만, 그날 밤 할아버지가 주무신 뒤 말씀하셨다. 당신은 자식에게 한자를 따로 가르칠 계획이 없으며, 한문을 모른다고 창피해할 일이 아니다. 아마도 한문을 깨우치는 일의 고단함과 함께 그게 더 이상 유효한 일도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에게도 집안의 장손으로서 당신의 제일 중요한 책무는 제사를 지내는 일인 것 같다. 퇴직 뒤 향교에 부지런히 다니시더니 전교를 지내신 걸 보면, 반쯤은 옛날 사람이다. 그래서 내색은 하지 않으나 종중 행사나 제사 같은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내게 나름 서운함을 갖고 계실 것이다.

1960년대 중반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 근대교육을 받고 서양 학문을 전공하여 외국에서 짧지 않은 기간 살면서 공부까지 했던 나는 뼛속 깊이 근대인이다. 명절이나 제사 같은 봉건적 풍습을 좋아하지 않고, 굿이나 점 같은 미신은 혐오하며, 한문으로 표현된 유교적 전통에 거의 관심이 없다. 과학과 기술이 미래를 좌우할 핵심 요소이기에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영어와 다른 외국어를 더 깊이 익히고 디지털 문화를 체득해 국경의 제한 없이 세상을 오가며 일하고 싶다. 그때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어쨌거나 할아버지는 중국을 세계의 전부로 아셨고, 아버지는 일본과 미국을 아주 높이 선망하며 신생 대한민국은 약소국이라고 알고 사셨다. 그에 반해 내게 중국은 매력이 전혀 없고, 일본과 미국은 그런대로 괜찮은 친구 같은 나라이며, 부럽던 복지국가 유럽도 막상 가서 살아보니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닌, 우리보다 특별히 나을 것 없는 그냥 삶의 공간이다. 이 말은 핏줄로 이어진 3대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세계관과 생의 비전을 갖고 있단 뜻이다. 그만큼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를 살아냈고, 그 속에서 각자 적응하느라 고생했으며, 그 노력 끝에 세계 최빈국의 불행을 벗어던지고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 안팎의 강소국이 되었다. 우리만 안에 있어서 잘 모를 뿐, 대한민국은 이미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기적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성공을 딛고 더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세계 최빈국이었던 조선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며, 조선이라는 과거의 기억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된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은, 과거에 붙들린 민족에게도 미래가 있을 수 없다는 말로 갈음하고 싶다. 근대의 기적인 대한민국의 미래를 더 멋지게 가꾸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일이야말로 세계시민으로서 우리가 주인공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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