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美 역사학자들 “이승만, 정당한 근거 토대로 판단해야”

워싱턴/이민석 특파원 2023. 5. 1.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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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동맹 70주년 맞아 미국 워싱턴DC서 국가보훈처 좌담회
미 저명 외교·역사학자 3인 “그의 공과 종합적 고려해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에 대한 한국 내 역사적 평가가 치우쳐져 있다며 그의 공과(功過)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제언이 미국의 외교·역사학자들로부터 나왔다. 윌리엄 스툭 조지아대 석좌교수, 그렉 브래진스키 조지워싱턴대 교수, 데이비드 필즈 위스콘신대 동아시아 센터 부소장 등 3인은 28일(현지 시각) 국가보훈처가 한·미 동맹 70주년을 기념해 미 조지워싱턴대 엘리엇스쿨(국제관계대학)에서 개최한 ‘이승만 대통령 재조명’ 좌담회에 참석했다. 이들은 이날 ‘친일 인사’ ‘미국의 앞잡이’ ‘분단의 원흉’ ‘전쟁 때 도주’ 등 이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4대 주장’에 대해 “상당 수는 당시 상황을 면밀히 고려하지 않았거나, 역사적 진실의 일부분만 담고 있는 왜곡”이라며 “이미 드러난 객관적 사실들로도 손쉽게 반박되는 것들이 많다”고 했다.

28일(현지 시각) 미 워싱턴DC 조지워싱턴대 엘리엇스쿨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 재조명' 간담회에서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발언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스툭 교수는 이날 “미국이 한국을 원조하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시 남한 정부가 농지 개혁 등 자유경제 정책 등을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해방 이후 수많은 변수와 위협 조건들이 엄존했던 상황에서도 이 전 대통령이 나라를 제대로 이끈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필즈 교수는 “이승만의 인생에는 집권 연장 등 결점도 있었지만, 조국을 위해 희생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며 “한국의 자유주의 개혁을 옹호한 점, 한국 독립운동을 위한 집념,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달성, 농지 개혁 등은 한국인들이 이승만을 존경할 수 있는 이유들”이라고 했다. 이어 “이승만은 현대 한국 사회와 한·미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준 ‘복합적 인물’로 기억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좌담회는 박민식 보훈처장이 미 교수 3인에게 이 전 대통령에 대한 한국 내 평가에 대해 묻고, 한종우 한국전쟁유업재단 이사장이 좌담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박민식 처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며 ”한미 동맹 70주년을 맞아 이 전 대통령을 역사적으로 제대로 복원시키는 다양한 노력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한종우 이사장은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입각한 사료에 기초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정치적 이해관계나 잣대를 통해 일방적인 정치공세를 취하는 오류는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28일(현지 시각) 오전 미 워싱턴DC 조지워싱턴대 엘리엇스쿨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 재조명' 간담회에서 그렉 브래진스키 조지워싱턴대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 중간은 박민식 보훈처장, 오른쪽 맨 위는 한종우 한국전쟁유업재단 이사장. /이민석 특파원

-한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親日)’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스툭 교수(이하 스툭) “이승만을 ‘친일’로 규정할 명분(justification)이 없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하에 둘 것을 주장했다. 이는 일본 통치의 영구화가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조기 독립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강한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승만과 일본은 매번 충돌했다. 그는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지속적으로 저항했고, 일본에 이익이 되는 미국의 정책엔 사사건건 반대했다.”

필즈 교수(이후 필즈) “한국에서 강연할 때 청중들에게 이승만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정당한 근거를 갖고 그를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한국 일각에선 이승만이 한국의 대일(對日) 테러 활동을 비판한 것, (일제 청산때) ‘일본과의 협력’의 정의를 좁게 정의한 것 등 을 두고 ‘친일’이라고 규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런 결정들은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최선의 정책’이라고 믿었다. 그의 정책들이 효과적이었는지, 그가 추구했던 목적이 제대로 달성됐는 지에 대해선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의도까지 ‘친일’이라고 하는 건 사실과는 동떨어진 주장이다.”

-이 전 대통령이 친일 청산에 소극적이었다는 평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필즈 “그는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질문은 ‘그들(친일 인사들)이 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냐’는 것이었고, 대답은 ‘그렇다’였다. 이념의 문제가 아닌 실용적 결정이었다. 그는 ‘친일’의 범위를 훨씬 더 넓게 잡고 더 많은 사람을 처벌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려면 당시 남한의 인구 반을 청산해야 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그의 입장에서 시급한 문제는 국가 건설 및 안보·치안 유지였다. 그는 이후 친일 인사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스툭 “1945년 미 군정 자체부터 준비가 안 돼있었다. 당시는 한국이라는 국가를 어떻게 지속할 지가 가장 중요했다. 국가를 이전에 운영해 본 사람들의 능력과 경험을 배제하기는 힘들었다. 프랑스의 ‘영웅’ 드골도 1945년 구성한 임시정부에 나치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 가담자들을 포함시켰다. 나치 협력자들을 다 축출할 경우 나라를 운영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나치 점령을 4년 동안만 받았는 데도 그렇게 했다. 한국은 36년간 일제 지배를 받았다.”

브래진스키 교수 (이하 브래진스키) “같은 이유로 미 군정은 이승만 보다 이른바 ‘친일 인사’들을 더 많이 기용했고, 일제 강점기 때의 행정 체계를 다시 세웠다. 미군이 이들을 기용하면서 ‘친일 인사’들은 이미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 ‘친일’ ‘협력’ 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가 매우 복잡한 정치역학적인 문제다. (한 측면에서) 단순 평가하기 어려운 문제다.”

-한국의 좌파 세력들은 이승만이 ‘미국의 꼭두각시’였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미국의 국가 이익만 따라가고 조국은 내팽개쳤다는 것이다.

브래진스키 “왜곡이다. 솔직히 어떻게 그런 인식이 가능한 지 모르겠다. 그를 미국의 ‘앞잡이’(stooge) ‘꼭두각시’(puppet)라고 부르는 건 북한, 중국 당국이 만든 문서 외엔 본 적이 없다. 그는 미국의 전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미국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한국의 통일 등) 그의 목적을 위해 미국의 입안자들을 효과적으로 휘두르기도(manipulate) 했다.”

스툭 “그는 정권 초기부터 미국이 반대했던 대한민국에 의한 무력 통일을 주장해왔다. 심지어 1954년에는 전쟁 재개를 옹호하는 의회 연설을 해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남한만을 위한 경제 계획을 세우라는 미국의 압력에도 시간을 끌었던 것은 통일을 간절히 원했고, 가까운 장래에 통일이 이뤄질 것 같지 않다는 신호를 한국 국민들에게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즈 “6·25전쟁 당시 미국 정책 입안자들은 이승만의 ‘비타협성’을 이유로 그를 제거하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했다. 이승만은 6·25 전쟁이 통일이 아닌 휴전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은 ‘에버레디’라는 작전을 통해 그의 제거를 구상하기도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미 군정청의 존 하지 중장(군정 사령관)이 미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에 대해 욕설을 쓰면서 골치가 아프다고 할 정도였다.”

-6·25 전쟁 발발 뒤 이승만 대통령이 도망갔다는 주장이 한국에 널리 퍼져있다.

필즈 “6·25 전쟁 당시 주한미대사관의 해롤드 노블 1등서기관이 쓴 ‘전쟁 중인 대사관(Embassy at war)’을 보면 이 대통령이 어쩔 수 없이 피신하다가 대전에 도착했을 때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여기서 죽겠다’고 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돼 부산까지 내려갔을 때도 미측은 ‘일본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절대 안된다, 죽어도 한반도에서 죽겠다’고 발언한 부분이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 일기에서도 그가 부산까지 대피하지 않고 버티는 데 대한 안타까움과 불안함이 잘 나와있다. 이를 도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스툭 “러시아의 침공에도 우크라이나에 남아있었던 젤렌스키와 이승만을 비교하는 경우도 있던데, 당시 군사적 상황은 한국과는 너무나도 다른 상황이었다. 이 전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있었다면 생포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도주한건 김일성 아닌가. 그는 인천상륙작전 다음 달인 10월 한국과 UN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강계시 동굴로) 도망쳤었다.”

-이 전 대통령이 ‘분단의 원흉’ 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스툭 “이승만은 한반도를 미·소가 분할 점령하는 데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 없었다. 일단 한반도의 분단은 미·소 열강의 결정과 책임에 따른 것이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추진은 소련과 북한 김일성이 공산화를 이미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까지 공산화되는 사태를 막으려는 의도였다. ‘이승만이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한국 내 좌파 세력의 비판 중 가장 큰 문제는 그럼 대안이 무엇이냐는 데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한반도 이북에서 권력을 잡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 지 말이다.”

브래진스키 “당시 국제적 맥락을 살피는 게 중요하다. 당시 미·소간 협상도 지지부진했고, 미국이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선거를 실시해 좌파 리더가 당선되는 것을 허용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이승만은 결코 통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1953년 이후 그는 북진 통일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면서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들 정도였다.”

필즈 “임시 정부 실패의 주 요인은 미국이었지 이승만 때문이 아니다. 미국은 임시정부안을 반대했다. 미 군정청의 하지 사령관이 임시정부를 찬성하고 한국에서 미국이 떠나자는 제안도 했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이 자신의 수석 고문이었던 미국인 로버트 올리버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공산주의란 마치 전염병인 콜레라와도 같아서 박멸해야 하는 것이지, 어르고 달래며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한반도) 독립의 대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내일이라도 엉클 조(소련 스탈린의 별명)와 손을 잡겠지만, 이는 대의를 거스르는 것이기에 그러지 않는 것”이라고도 했다. 38도 이북에 공산주의를 남겨놓고선 진정한 통일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내건 김일성의 토지개혁과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각자 어떤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하나.

필즈 “남·북한의 토지 개혁을 비교하기 위해 남한의 성공을 보여줄 수 있는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오늘날 남과 북을 비교할 때 어느 쪽이 조선 시대 사회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북한이다. 남한은 7에이커(2만8300㎡·약 8570평) 이상의 땅을 유상 매입 한 뒤 유상 분배했지만, 북한은 불과 1에이커(약 1220평) 이상의 농지를 무상몰수·무상분배했다. 땅 크기가 너무 작아 농민들이 세금을 낼 수가 없었고, 북한 정부는 세수가 부족해지자 농민들 땅을 집단 농장화했다. 결국 북한 농민들은 사실상 정권이라는 대지주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반대로 남한은 자작지(自作地) 비율을 계속 늘려 자작농지가 96%까지 올랐다. 자작농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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