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주80시간만 일하라는데... 실제론 120시간을 찍어요
소수의 사명감에만 의존하는 바이탈과 실정
편집자주
한국은 의료 가성비가 좋다고 하죠. 아프면 예약 없이 3,000~4,000원에 전문의를 보는 나라, 흔치 않으니까요. 그러나 건보 흑자, 일부 의료인의 희생 덕에 양질의 의료를 누렸던 시대도 끝나 갑니다. 지방 병원은 사라지고 목숨 살리는 과엔 지원자가 없는데, 의대 정원은 18년째 3,058명입니다. 의사 위상은 높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의료 효능감은 낮아지는 모순. 문제가 뭘까요? 붕괴 직전에 이른 의료 현장을 살펴보고, 의사도 환자도 살 공존의 길을 찾아봅니다.
※ '피부·미용 유혹을 이기고... 내가 '바이탈 의사'로 사는 이유'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42418330004464)
"대동맥 박리처럼 어려운 수술은 12시간, 14시간도 해요. 오전 8시 수술방 들어가서 오후 7시에 나오면, 그때 '아침 겸 점심 겸 저녁'을 먹죠. 저희 교수님 왈 '굶는 것도 수련'이라 그러세요(웃음)."
후배 못 받는 '현실 김준완'
"밥은 챙겨 먹느냐"는 질문에 흉부외과 전공의 박윤지(가명)씨는 '웃픈' 목소리로 답했다. 워낙 바쁜 일정 탓에 인터뷰는 오후 9시에야 시작됐다. 박씨의 월평균 당직은 11번. 당직 때는 전공의법 상 허용되는 '36시간 연속근무'를 한다. '본인도 궁금해서' 계산해 봤다는 주 평균 근로시간은 110~120시간. 주 7일 꼬박 일해도 하루 17시간씩 찍어야 가능한 숫자다. 수술방에서 꼬박 밤을 새도, 다음날 근무면 여지없이 출근해야 한다. 왜 그렇게 '무식하게' 일하냐고? 그가 이 병원의 유일한 흉부외과 전공의기 때문이다.
원칙대로면 법에 따라 전공의 근로시간은 주 80시간(교육시간 포함 시 88시간)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현실은 멀다. 실제로 밥은 수술 때문에 거르기 일쑤고, 밤에는 30분·1시간 단위로 쪽잠을 잔다. 수술 환자 바이탈(활력 징후)도 중간중간 확인해야 하고, 응급실 호출도 잦아서다.
이렇게 매달 400시간 이상 일해 버는 돈은 세후 월 600만 원대. 사람이 없어 당직 횟수는 많고, 흉부외과 전공의 수련보조수당이 있어서 그나마 '전공의 치고는 높은 편'이다.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공의 평균 월급(세후)은 398만 원이다.
물론 임금 근로자의 평균 월급 333만 원, 대기업 평균 월급 563만 원(통계청 2021년 임금근로 일자리 소득 결과)에 비하면 적지 않은 액수지만, 그가 수련 받기 전 요양병원 당직 아르바이트를 잠깐 할 때 '아주 편하게' 월 800만~900만 원을 벌던 것과 비교하면 적다. 그럼에도 박씨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며 흉부외과에 자원했다.
'사람 가뭄'인 흉부외과에선 교수도 당직을 선다. 대한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가 2020년 9월에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대형 종합병원 근무 흉부외과 전문의 327명 중 51.7%가 '번아웃'(정신·육체적 기력 소진) 상태라고 대답했다. 일 평균 근무시간은 12.7시간, 월평균 5.1일 밤샘 당직, 10.8일 온콜(병원 밖 야간대기) 당직이 그들의 일상이다.
고된 일상을 묻는 질문에도 별 하소연 없이 담담하게 힘든 일상을 풀어놓던 박씨였지만, 인력 부족과 근로환경 개선 얘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과에 파견 간 적이 있는데, 다른 전공의가 당직을 서니 제가 퇴근해도 다른 누군가가 제 환자를 잘 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마음 편하게 집에 갔죠. 근데 여기(흉부외과)는 사람이 없으니 중환자가 있으면 두고 가기 어려워요. 그럴 때는 참, 사람 없이 일하는 게 어렵다고 느끼죠."
흉부외과 탈출 비율은 피부과의 10배
"힘들지만 아직까진 후회 없이 재밌게 일하고 있다"는 박윤지씨는 따지고 보면 별종 중의 별종이다. 매년 배출되는 약 3,058명(의대 입학 정원)의 의사 중 흉부외과 수련을 택하는 인원은 1% 안팎. 젊은 의사 상당수는 "기피과는 안 가는 게 합리적 선택"이라고 말한다.
피안성·정재영 같은 '선호과'에 비해, 필수 의료 분야는 ①일은 훨씬 고된데 ②금전적 보상과 향후 커리어 선택지 차원에서 미래는 불투명하고 ③소송 리스크까지 크다.
다 죽어 가던 중증 환자가 제 두 발로 걸어 퇴원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내과를 택했다는 한 전문의. 그는 급성심근경색 등을 치료하는 '심장내과 전문의'를 꿈꿨지만, 향후 3년간 '펠노예'로 버텨야 하는 상황에 뜻을 접었다. 펠노예는 전임의(펠로)의 열악한 근로 여건을 칭하는 은어다.
"제가 아는 심장내과 지인이 두 명인데 한 명은 2년간 매일 당직, 또 다른 한 명은 이삼일에 한번 꼴로 당직을 한다더군요. 내과 온 걸 지금은 극도로 후회합니다. 야간 당직 많이 해야 하고, 시술하면서 방사선 노출은 극심하고, 소송 위험에도 상시 노출되고.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해도 이런 '미친 짓'은 도저히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앞선 대전협 실태조사에 따르면, 흉부외과·산부인과·외과·소아청소년과 등 필수과 전공의 10명 중 6명 이상이 "수련을 중도 포기하고 싶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2018~2022년 전공의 이탈율이 흉부외과는 14.1%, 외과 13.0%인 반면에 재활의학과는 5.0%, 피부과는 1.3%였다(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빅 5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내과 전임의 권태석(37·가명)씨의 고민도 깊다. "예전에는 대학병원에서 일하면 집도 사고 결혼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밖(개원가)에 나가야 돈을 벌 수 있으니 계속 '나가야 되나' 싶죠. 저도 일부 비양심적인 의사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밖에 안 나가고 버티고는 있지만, 의사로서 진짜 필요한 진료만 해도 어느 정도 삶이 영위되는 선택지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의사들이 기대하는 소득 수준 자체가 높다'는 건 의사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몸도 마음도 더 편하고, 위험 부담은 적고, 돈은 훨씬 잘 버는' 의사가 분명 존재하는 상황에서 응급·중증환자를 보는 필수의료 분야 의사들의 명예와 존중도 추락하니, 힘들게 대형병원에 남아서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된다는 것이다.
미용 의사를 꿈꾸는 소아과 전문의들
'소아' 글자가 붙은 전문과목은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위기상황이다. 출생율 감소로 환아가 줄어들 것은 불 보듯 뻔한데, 수가는 낮으며 진료엔 시간이 더 들고, '환아 1명이 아닌 보호자까지 두셋을 상대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다. 소청과의 올해 전국 수련병원 전공의 충원율은 25.5%, 심지어 비수도권 소재 수련병원 충원율은 6.9%였다.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대전협 협조로 개설한 '바이탈과 전공의·전문의 익명채팅방'에서 소아과 전문의 A씨는 "신생아를 살리는 게 멋있어 과를 택했지만, 소청과는 전문의 자격을 따도 실업자 수준이라 미용·통증 분야를 새로 배워 타과 진료 과목으로 넘어가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대학병원 입장에서도 매출도 안 나오는 '거지과' 의사를 앉혀놓을 이유가 없다"는 극단적인 말도 나왔다.
소아 환자를 수술할 외과계 분야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앞서 언급한 소아외과를 비롯해 소아흉부외과·소아신경외과·소아성형외과(안면기형) 등 세부 분과 전문의는 20명 안팎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석 대한심장혈관흉부외과학회 기획홍보위원장(강북삼성병원 흉부외과 교수)은 "소아심장 수술 분야는 활동 의사가 20명 정도, 수술이 가능한 센터도 전국에 6개, 많게 봐도 열몇 개"라며 "나라에 등록된 수술 이름도 없는 게 많아서 1년에 몇 건 하는지 수술 현황도 모르고, 그걸 모르니 적절한 보상 수준(수가)을 결정할 근거 자료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술을 제때 못해 죽는 아이가 늘어도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식으로 문제가 잘 가시화되지 못한다"고 했다.
서서히 꺼져가는 '바이탈과'의 동력
필수의료 분야가 그나마 유지되는 것은 소수 의사들이 '후회'와 '현실 자각'을 하면서도 자부심과 보람을 끈질기게 놓지 않고 있는 덕분이다.
수도권 대학병원 소청과 2년차 전공의 최지수(32·가명)씨의 회상이다. "하루는 너무 바쁘고 힘든 날에 타지에서 환아가 전원(병원을 옮기는 것)을 온다기에, '왜 하필 여기로 올까' 내심 생각했어요. 막상 환아가 오고 나서는 열심히 돌봤는데 그 아이가 잘 회복해서 퇴원했어요. 어머니가 '저희 ○○이 첫 주치의가 돼주셔서 감사하다'고 편지를 써주신 것을 받고 많이 반성했어요. 그 뒤로는 힘들어도 초심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흉부외과 박윤지씨도 사람을 살린 짜릿한 기억을 잊지 못했다. "더는 못 사실 것 같다 싶던 코로나 환자가 에크모(인공심폐기) 치료 후에 멀쩡하게 퇴원하시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했고, 또 투신 사고로 갈비뼈가 거의 부서져서 오셨던 환자 분이 '열심히 잘 살겠다'고 편지 써주셨을 때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사실 이런 것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필수의료 분야 의사들은 '바이탈뽕(위급한 환자를 살릴 때 느끼는 보람을 빗댄 은어)'을 맞은 소수 의사를 혹사시키며 사명감만으로 버티게 하는 현 상황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입을 모았다.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보상을 강화하고, 대형병원이 '값싼'인 전공의 대신 전문의 채용을 늘리도록 유도하는 등 의료 인력 확충과 근로 환경 개선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시운 교수의 스승인 방재승(53)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의 말을 들으면, 바이탈과를 지금껏 밝혀 온 등불(소수의 사명감)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배가 없어서 1년 355일 당직하던 때는 하루 4시간 정도 잤죠. 그래도 요즘에는 5시간 정도는 잡니다. 당직실 소파에서 자고 있으면 응급 환자 왔다고 콜이 와요. 그때는 저도 솔직히 '제발 남아있는 중환자실 없어라' 생각 들죠. 근데 열심히 하는 전공의가 '중환자실 하나 구했습니다' 그래요. 중환자실 있는데 환자를 보낼 순 없잖아요. 그럼 날밤 새면서 수술하고, 다음날 아침에 바로 수술 들어가든지 외래 보든지 했죠. 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게 저의 임무라고 생각하면서요. 근데 지금 후학들에게도 저처럼 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건 너무 가혹합니다. 이런 삶은 제 세대에서 끝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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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슬의생 99즈'는 없다
- • 피부·미용 유혹을 이기고... 내가 '바이탈 의사'로 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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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투석 환자는 고향에 못 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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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박지영 기자 jy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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