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손길] 미·일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 한 그루’

기자 2023. 5. 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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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와 강한 동맹을 목적으로 하니
미 국익이 우리의 국익인 양 돼
결국 신냉전 최전선에 배치되고
일본에 과거사 사과·배상 요구는
우리가 몽니를 부리는 일이 돼

지난 4월8일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외신이 ‘미국 정보 당국이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을 도·감청한 문건 100여쪽이 유출됐다’고 보도했다. 우리와 관련해선 미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요청과 관련된 민감한 내용이 있었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그런데 우리 정부의 반응이 이상했다. 미국 언론 보도 내용이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고, 해당 문건이 상당수가 위조됐다고, 심지어 동맹국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악의를 가지고 도청을 한 정황은 없다는, 미국 정부나 할 변명을 연이어 내놓았다. 정작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이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도청 사실을 시인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미국에 사과나 재발 방지를 공식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 왜 주권 침해에 대해 제대로 문제조차 제기하지 않은 것일까?

지난 4월19일엔 윤석열 대통령이 ‘로이터통신’과 한 인터뷰가 파장을 일으켰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 관련 언급이 러시아와 중국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관련해 불법적인 침략을 받은 나라에 대해서는 인도적 지원이나 재정지원에 머물러 고집할 수 없다며 군사적 지원을 에둘러 언급했다.

중국과 관련해서도 대만과 중국 문제는 단지 양자만의 문제가 아니며, 북한 문제처럼 세계적인 문제라고 언급했다. 중국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하나의 중국’이란 기조를 건드린 발언이었다. 당연히 러시아도 중국도 강력하게 반발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두 강대국을 자극해서 좋을 것이 없는데 윤 대통령은 왜 공개적으로 자극한 것일까?

4월24일에는 윤 대통령의 ‘워싱턴포스트’ 인터뷰가 논란이 됐다. 대통령이 ‘100년 전 역사 때문에 일본에 무조건 무릎 꿇으라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발언했기 때문이다. 논란이 일자 여당은 무조건 무릎 꿇으라고 하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논란이 심각해지자 윤 대통령을 인터뷰한 기자 당사자가 대통령의 한국어 발언을 그대로 SNS에 올렸다. “100년 전에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과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주체는 일본이 아니라 윤 대통령이었다. 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까?

믿기지 않지만, 이 모든 논란이 20여일 사이에 일어났다. 그리고 모든 사안과 관련해 달았던 질문에 대한 답의 공통점은 ‘미국’과의 관계에 있다. 대통령과 여당이 소원해졌다고 판단하는 미국과 강력한 동맹을 재구축하자면 미국의 관심사에 우리가 먼저 맞추어야 한다. 그러니 미국이 대통령실을 도청하더라도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다. 현재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러시아를 제압하고, 패권경쟁에서 동맹을 통해 중국을 봉쇄하는 과정에 있다. 미국의 적은 우리의 적이기에 이 두 사안과 관련해 미국의 이익과 어긋나는 발상은 있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해 미국 관점에서 보면 이 과정에 일본은 우리보다 더 중요한 국가다. 일본은 경제 대국에다 중국을 마주 보는 동중국해 가장자리 마게시마 섬을 통째로 사들여 미국의 항공모함 함재기 훈련장까지 제공하는 국가다. 일본 역시 중국의 위협, 북한의 위협을 계기로 이제 전범국의 사슬을 벗고 군사 대국으로 나서려 한다. 두 나라의 이익이 이렇게 맞아떨어지니 일본과 과거사에 발목 잡힌 한국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강력한 동맹 회복의 증거가 북한의 핵위협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를 확고히 보장받는 데 달렸다고 본 것 같다. 우리 경제의 미래가 달린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와 관련된 규제 법안들에 대해선 실질적으로 아무 성과가 없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워싱턴 선언은 자신에게 큰 성과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선언에 알맹이가 있느냐이다. 한국 정부는 이 선언을 ‘사실상의 핵공유’라고 들떠서 홍보했다. 하지만 백악관은 이내 ‘핵공유가 아니다’라며 명확히 선을 그었다. 돌아보면 미국은 북의 핵개발 행보에 맞서 꾸준히 핵억제력을 키워왔다. 미국이 무엇을 약속하든 이제껏 해오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미국과의 강력한 동맹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다 보니 미국의 국익이 마치 우리의 국익인 양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지정학적으로 러시아 및 중국과 맞서는 신냉전체제의 최전선에 다시 배치되었고, 일본과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 및 배상 요구는 오히려 우리가 몽니를 부리는 일이 되어버렸다. 미국은 그렇게, 일본은 덩달아 아낌없이 주는 나무 한 그루를 얻었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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