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90년 전 경성의 ‘과학지식보급회’ 열풍을 아십니까
조선전역 발명붐, 특허출원 5배 증가…그 열망이 한국 성장 발판
특허는 세계 4위·산학 소통은 최하위… 과학과 발명 함께 가야
지난 4월 21일은 과학의 날이고, 오는 5월 19일은 발명의 날이다. 떨어진 두 날짜만큼이나 과학과 발명은 별개 같지만, 100년 전 우리 지식인들 생각은 달랐다. 시작은 1924년 김용관이 조선일보에 발명학회 설립을 제안한 일. 그는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1회로 졸업한 엔지니어였다. 이 학교는 대한제국이 이공계 교육을 위해 설립한 공업전습소를 이은 것으로, 졸업생들은 최초의 과학도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래서 공우구락부(工友俱樂部)를 만들고, 1920년 10월 20일 공우(工友)라는 잡지를 창간해 과학 계몽에 앞장섰다. 이 창간호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조선에 처음 소개했다.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기 전이다.
김용관은 무려 8회에 걸친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발명학회의 목적이 ‘이화학연구소’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고정비가 계속 들어가야 하는 학교와 달리, 일단 연구소를 설립하면 연구 성과가 사업화하고, 특허 수입 등으로 연구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렇게 운영되는 실제 사례를 든다. 1917년 민간 재단으로 출범한 일본의 ‘이화학연구소(理化學研究所)’였다. 줄여서 ‘리켄(理研)’이라 부르는 이 연구소는 1911년 시작된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현재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영향을 받았다. 특이한 점은 리켄은 연구 성과로 기업을 만들었고, 수십 기업을 거느리며 일본 재계 10위권 재벌로 성장한다. 일본 최초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와 두 번째 수상자인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모두 리켄이 배출한 물리학자다.
하지만 1924년 설립한 발명학회는 재정 부족으로 유명무실해졌다. 보다 못한 김용관은 항일 운동 사건 변호에 앞장서던 이인(李仁) 변호사에게 도움을 청한다. 우리나라 최초 변리사 이인은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이 되는 인물이다. 이인은 윤치호, 여운형 등을 끌어들여 발명학회를 대중 과학 운동과 결합한다. 1933년 발명학회가 재정비되고, 같은 해 김용관은 조선일보에 지면에서 5회에 걸쳐 또다시 이화학연구소 설립을 촉구한다. 산업에 기초한 과학 육성,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그리고 1933년 6월 발명학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 잡지 ‘과학조선’을 발간한다. 순식간에 초판이 매진되자, 과학에 대한 폭발적 수요를 확인한 이들은 즉각 새로운 행동에 들어갔다.
1934년 4월 19일 서울 시내는 ‘과학데이’라는 행사로 들썩였다. 김용관은 찰스 다윈의 50주기인 1932년 4월 19일 전 세계에서 과학 행사가 열리는 데서 자극받아 이날 대중 과학 운동을 벌인 것이다. 사람들의 호응은 엄청났고, 발명학회는 이해 여름 ‘과학지식보급회’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든다. 회장 윤치호, 부회장 이인, 그리고 고문으로 여운형, 방응모, 김성수 등이 지도부를 구성하고 실무는 김용관이 맡았다. 1935년 4월 19일 2회 과학데이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자동차가 무려 54대 현수막을 걸고 시내를 누볐으며, 홍난파가 작곡한 ‘과학의 노래’를 군악대가 연주했고, 토론과 강연, 활동사진 상영이 이어졌다. 이들이 외친 “한 개의 시험관은 전 세계를 뒤집는다”는 구호가 전국을 뒤덮었다.
이러한 과학 운동으로 1935년 조선 전역에 발명 붐이 일어나 과학데이를 기점으로 특허 출원이 무려 5배나 증가한다. 발명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이들이 펼친 과학 지식 수준도 높았다. 과학데이 대중 강연을 맡았던 우리나라 최초 물리학 박사 최규남은 1936년 초 “신흥 물리학의 추향”이라는 시리즈 6편을 조선일보에 연재한다. 기고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양자역학이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일찍이 전 세계 과학에 일대 혁명적 센세이션을 일으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어언간에 고전물리학으로 귀결되었고 현대 물리학계에 가장 새로운 이론은 드 브로이,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폴 디랙, 플랑크 등의 파동역학(Wave mechanics),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및 양자론(Quantum theory)이라고 하겠다. … 인간의 사상사가 생긴 이래 철칙으로 믿어오던 인과율도 사라질 운명이 되었고….”
이화학연구소가 계속 추진되었고, 우리나라 최초 화학 박사가 된 교토제국대학의 이태규에게 연락해 합류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0년대 시작된 대륙 침략으로 과학조차 제약받기 시작했다. 과학데이 행사가 독립운동임을 간파한 일제는 1937년부터 실외 집회를 금지하고, 1938년 다섯 번째 과학데이 행사를 마친 김용관을 체포하면서 과학지식보급회는 해체된다. 이들이 꿈꾸던 연구소는 박정희 정부가 1966년 KIST를 만들며 실현되었다. 최규남은 준비위원장이었고, 이태규가 자문을 맡았다. 대한민국의 급속한 성장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과학에 대한 열망이 이어진 것이다.
2022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하는 국가 경쟁력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평가 대상 63국 중 27위를 기록했다. 정부 효율성 36위, 기업 효율성이 33위로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유독 과학 인프라 부문이 3위로 눈에 띈다. 그런데 과학 경쟁력 세부 지표를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특허는 최상위이지만, 노벨상 부문과 지재권 보호 분야가 최하위를 기록하고, 특히 산학 간 지식 전달이 최하위로 양극화가 심하다. 소통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는 과학과 발명을 같이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다. 일본의 노벨상도 그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4월 과학의 달이 지나고 발명의 날을 맞이하는 이 시점, 더 넓은 시각으로 과학의 미래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Korea’s defense industry now proposes new approaches we can learn from,” says Lockheed Martin
- “우크라전 조력자 中에 반격”...나토 항모들, 美 공백 메우러 아·태로
- 무릎 부상 장기화된 조규성, 오랜만에 전한 근황
- 박성한 역전적시타… 한국, 프리미어12 도미니카에 9대6 역전승
- “한국에서 살래요” OECD 이민증가율 2위, 그 이유는
- 연세대, ‘문제 유출 논술 합격자 발표 중지’ 가처분 결정에 이의신청
- ‘정답소녀’ 김수정, 동덕여대 공학 전환 반대 서명…연예인 첫 공개 지지
- “이 음악 찾는데 두 달 걸렸다” 오징어게임 OST로 2등 거머쥔 피겨 선수
- “이재명 구속” vs “윤석열 퇴진”… 주말 도심서 집회로 맞붙은 보수단체·야당
- 수능 포기한 18살 소녀, 아픈 아빠 곁에서 지켜낸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