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의 콘텐츠 공짜로 끌어쓰기’가 너무 쉽다[광화문에서/김현지]
김현지 미래전략연구소 사업전략팀장 2023. 4. 30. 21:30
#1. 지방 C대 한 학과의 2학기 전공강좌 교재로 P출판사의 책이 선정됐다. P출판사는 수강생 200명 중 절반 정도가 책을 살 것으로 보고 100권을 인쇄했다. 하지만 실제 팔린 책은 단 1권에 불과했다. 출판사 측은 학생 한 명이 대표로 책을 사서 복사한 후 수강생 전체가 공유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2. 법학전문대학원 교재를 납품해온 A출판사 대표는 로스쿨 재학생 온라인 커뮤니티에 신학기 법학 교재 70만 원어치가 전자문서로 복제돼 단돈 5000원에 팔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자문서는 공유하기가 쉽기 때문에 한 번 복제되면 해당 책의 수명은 사실상 끝난 것과 마찬가지다. 참다못한 A출판사는 교재를 스캔해 판매한 학생과 이를 구매한 학생 50명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1번 사례는 1999년 2월, 2번 사례는 2023년 4월 각각 본보 기사에 소개된 것들이다. 두 기사의 시차는 무려 24년. 하지만 1번에서 ‘복사’라는 단어를 ‘스캔’으로 바꿔놓으면 2번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출판업계의 해묵은 골칫거리인 콘텐츠 무단 복제가 요새는 인공지능(AI) 산업계에서도 뜨거운 감자가 됐다. 개발사들이 AI 학습용 데이터 확보에 열을 올리며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콘텐츠를 마구잡이로 복제하고 있는 것이다.
챗GPT 돌풍을 일으킨 미국 오픈AI는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사 기사, 게티이미지의 사진과 일러스트, 트위터와 레딧에 올라온 글과 대화를 끌어와 사용했다. 하지만 저작권자에게 미리 고지를 하거나 허락을 받지 않았고 사용 대가도 치르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네이버가 제휴 언론사의 기사 데이터를 언론사와 협의 없이 AI 자회사에 넘겨주려다 뭇매를 맞았다.
이렇게 허락 없이 콘텐츠를 사용하는 일이 시대와 산업, 국경을 넘나들며 벌어지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이 일이 너무 쉽기 때문일 것이다. ‘쉽다’는 것은 복제를 하는 일이 물리적으로 어렵지 않고 무단 사용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부담도 그리 크지 않다는 의미다.
복사나 스캔은 단순 작업이다. 저작권법을 위반하면 5년 이하 징역, 5000만 원 이하 벌금형을 받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집행유예나 수백만 원의 벌금에 그치는 일이 많다. 온라인 콘텐츠 복제는 더 쉽다. 크롤링봇을 만들어 뿌리면 된다. 현행 저작권법은 ‘사람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사람이 아닌 크롤링봇이 콘텐츠를 복제하는 행위가 법을 위반한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지침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내 노고(勞苦)의 결과물이 예사롭게 복제돼 여기저기 사용되고 있는데 정작 나는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다면 누가 그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싶을까?
산업계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수십 년간 같은 문제가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 복제의 심각성을 정부와 국회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런 상태로 AI 저작권 문제를 잘 풀 수 있을지 미리 걱정된다.
저작권자들이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수확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지 않으면 모든 지식, 창작 산업의 발전은 곧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데이터가 돈’인 디지털 경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2. 법학전문대학원 교재를 납품해온 A출판사 대표는 로스쿨 재학생 온라인 커뮤니티에 신학기 법학 교재 70만 원어치가 전자문서로 복제돼 단돈 5000원에 팔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자문서는 공유하기가 쉽기 때문에 한 번 복제되면 해당 책의 수명은 사실상 끝난 것과 마찬가지다. 참다못한 A출판사는 교재를 스캔해 판매한 학생과 이를 구매한 학생 50명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1번 사례는 1999년 2월, 2번 사례는 2023년 4월 각각 본보 기사에 소개된 것들이다. 두 기사의 시차는 무려 24년. 하지만 1번에서 ‘복사’라는 단어를 ‘스캔’으로 바꿔놓으면 2번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출판업계의 해묵은 골칫거리인 콘텐츠 무단 복제가 요새는 인공지능(AI) 산업계에서도 뜨거운 감자가 됐다. 개발사들이 AI 학습용 데이터 확보에 열을 올리며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콘텐츠를 마구잡이로 복제하고 있는 것이다.
챗GPT 돌풍을 일으킨 미국 오픈AI는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사 기사, 게티이미지의 사진과 일러스트, 트위터와 레딧에 올라온 글과 대화를 끌어와 사용했다. 하지만 저작권자에게 미리 고지를 하거나 허락을 받지 않았고 사용 대가도 치르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네이버가 제휴 언론사의 기사 데이터를 언론사와 협의 없이 AI 자회사에 넘겨주려다 뭇매를 맞았다.
이렇게 허락 없이 콘텐츠를 사용하는 일이 시대와 산업, 국경을 넘나들며 벌어지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이 일이 너무 쉽기 때문일 것이다. ‘쉽다’는 것은 복제를 하는 일이 물리적으로 어렵지 않고 무단 사용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부담도 그리 크지 않다는 의미다.
복사나 스캔은 단순 작업이다. 저작권법을 위반하면 5년 이하 징역, 5000만 원 이하 벌금형을 받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집행유예나 수백만 원의 벌금에 그치는 일이 많다. 온라인 콘텐츠 복제는 더 쉽다. 크롤링봇을 만들어 뿌리면 된다. 현행 저작권법은 ‘사람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사람이 아닌 크롤링봇이 콘텐츠를 복제하는 행위가 법을 위반한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지침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내 노고(勞苦)의 결과물이 예사롭게 복제돼 여기저기 사용되고 있는데 정작 나는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다면 누가 그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싶을까?
산업계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수십 년간 같은 문제가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 복제의 심각성을 정부와 국회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런 상태로 AI 저작권 문제를 잘 풀 수 있을지 미리 걱정된다.
저작권자들이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수확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지 않으면 모든 지식, 창작 산업의 발전은 곧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데이터가 돈’인 디지털 경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김현지 미래전략연구소 사업전략팀장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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