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끼리도 존댓말 [만물상]
1990년대 서울의 한 고교는 신입생이 들어오면 인사법부터 바꿨다. 교사에게는 물론이고 친구 사이에도 ‘저는 효자입니다’라고 존댓말 인사를 하게 했다. 취재차 찾아가 이유를 물었더니 “그렇게 해보니 예의 바른 학생이 되더라”고 했다. 실제로 학교엔 “반말하고 버릇없던 아이가 존댓말 쓰는 아이로 바뀌었다”는 학부모 감사 편지가 쇄도했다. 말에는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다. 언어철학자인 이규호 전 연세대 교수도 저서 ‘말의 힘’에서 “언어는 단순한 표현 수단을 넘어 사람됨을 이룩한다”고 했다.
▶한국 문화를 처음 접하는 일본인들이 놀라는 것 중 하나가 한국인의 거친 입이다.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는 서울대에서 조선의 유학을 연구한 것을 토대로 저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냈다. 이 책에서 오구라 교수는 한국인의 입이 거친 이유를 사무라이와 유교 문화의 차이에서 찾았다. “일본인은 칼로 싸우는데, 한국인은 말로 싸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의 나라 일본에서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자칫 목숨이 위태롭다. 반면 유교 문화권인 한국에선 ‘죽음을 걸 정도로 말싸움이 격렬해진다’고 했다. 한국인은 말을 칼처럼 쓴다는 의미다.
▶그런 사회에서 아이들이라고 다를 리 없다. 교육부가 올해 초·중·고 학생 380여 만명을 대상으로 학교 폭력 실태를 조사했더니 5만여 명이 피해를 호소했다. 그중 언어 폭력이 41.8%로 가장 많았다. ‘학교 폭력을 당했다’고 답한 학생 중 초등학생 비율은 3.8%로 고교생(0.3%)보다 12배 많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말만 곱게 쓰도록 가르쳐도 갈수록 흉포화하고 어려지는 학폭 추세를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친구 사이에 존댓말 쓰고 ‘00님’으로 부르게 하는 초등학교가 늘고 있다는 기사가 지난 주말 조선일보에 실렸다. 10여 년 전 일부 기업이 시작한 존댓말 쓰기를 도입해 학폭을 줄이자는 취지라고 한다. 소파 방정환도 1923년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끼리라도 존댓말을 쓰자고 제안했다. 오늘날 학폭 사태를 미리 내다본 듯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학생들한테만 존댓말 쓰라고 할 일도 아니다. 필자의 학창 시절 선생님 몇 분은 교단에 오르면 꼭 존댓말을 썼다. 돌이켜보면 그게 살아있는 언어 예절 교육이었다. 초등학교에서 확산하는 존댓말 쓰기를 우리 사회의 언어 순화 운동으로 확대하면 어떨까. 아이들 따라 한다고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다. 19세기 영국 시인 워즈워스도 일찍이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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