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여기나 저기나 … '돈봉투 사건'과 국민의 염증
2002년 대선자금 차떼기 사건
2012년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2023년 제1야당 돈봉투 사건
여야 막론하고 반복되는 부패
2002년 대선자금 차떼기 사건이 불거졌다. 10년 후인 2012년 그 당에서 2008년 전당대회에서 오간 것으로 보이는 '돈봉투 사건'이 터졌다. 우연히 상대적 우위를 점한 반대편 당은 '부패한 보수 깨끗한 진보'란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2023년 바로 그 당에서 '돈봉투 사건'이 터졌다. 여기나 저기나 똑같이 부패한 정치권을 보면서 국민은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지체 높은 정치인들은 역사의 무서움을 알기나 할까.
선조는 평소에 믿어오던 류성룡을 면직시키기 난처했다. 하지만 동인의 잘못된 판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서인의 주장이 틀렸다고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서인의 앙탈을 막을 힘조차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류성룡을 파면하고 이양원을 영의정으로 내정했다가 다시 최흥원을 영의정으로, 윤두수를 좌의정, 유홍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요즘 말로 촌극이 펼쳐진 것이다. 특히 우의정이 된 유홍은 자신의 가족들을 이미 피난시켜 놓고 '왕이 한양을 버려선 안 된다'는 상소를 올린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3정승의 자리는 서인의 몫이 됐다.
이때쯤, 강원도 조방장 원호는 불과 300명의 군사로 여주를 지키며 한강 뱃길을 끊는 데 성공했다.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군 제1군은 나흘 동안 강을 건너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강원감사 유영길이 여주에 있던 원호를 강원도로 불러들였다. 졸지에 강을 지킬 아군의 강력한 지도자 한명이 사라졌다. 기회를 얻은 왜군은 민가를 헐어서 나온 목재로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넜다. 이렇게 여주를 돌파한 왜군부대는 양근읍楊根邑을 거쳐 서울 공략에 고삐를 당겼다.
그 무렵, 한양의 관문인 한강을 지키고 있던 도원수 김명원은 제천정(서울 한남대교 북단에 있었음)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며 종사관들에게 술을 따르게 했다. 적군이 오는 것도 모른 채 한시에 운자를 다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 얼핏 강 건너편에서 움직이고 있는 왜군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손에 무기를 드는 대신 도원수 제복을 벗어 던지고 달아날 궁리를 했다.
종사관 심우정이 "대감은 국가의 간성지장干城之將(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장군)인데 싸우지도 않고 어디로 간단 말이오"라며 김명원을 말렸다. 그런데도 김명원은 종사관을 뿌리치며 달음박질했다.
"금수만도 못한 놈!" 심우정은 이렇게 쏘아붙이고 병사들을 수습, 강을 건너는 적을 이틀이나 막아냈으나 끝내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도대장 이양원은 한성을 버리고 양주로 달아났다. 역사가 무서운 줄 몰랐던 지체 높은 지도자들의 모습이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 지도자들의 민낯을 한번 더 들여다봐야겠다. 제1야당이 '돈봉투' 논란에 휘말렸다. 전직 당 대표부터 유력한 정치인까지 이름이 줄줄이 거론된다. 녹취록을 들어보면, 이들이 국민 삶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사람들인지, 돈이 필요해 정치를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다. '오빠' '형'이란 호칭마저 달갑지 않게 들린다.
더 놀라운 건 이들이 2002년 한나라당 대선자금 차떼기 사건, 2008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박희태 돈봉투' 사건을 그토록 비난했던 세력이란 점이다. 이 때문인지 그들이나 저들이나 똑같다는 허망한 말들이 나돈다. 눈 씻고 찾아봐도 역사를 무서워하는 지도자가 없다는 비아냥도 쏟아진다.
실제로 정부 지지율이 30% 선을 오락가락하지만 '직전 정부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드물다. 연일 말실수를 하는 국민의힘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제1야당을 응원하는 이들도 많지 않다. 현 대표와 전 대표가 모두 검찰 수사를 받는 지경에 몰렸으니 염치가 있다면 응원을 호소할 입장도 아니다. 다만 몇십년 후, 아니 몇백년 후 후대 사람들은 지금 정치권의 민낯을 어떻게 해석할까.
다시 임진왜란으로 되돌아와 보자.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군 제1군은 5월 3일 여유롭게 동대문 밖에 이르렀다. 그런데 성안이 너무 조용했다. 동대문 왼편의 수문을 깨뜨리고 성안에 들어섰는데 누구 하나 내닫는 사람이 없었다.
길거리의 한 상인을 잡아 와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예상외로 술술 불었다. "상감님은 3일 전에 튀었소. 수비를 맡은 유도대장도 달아났으니, 보시는 대로 텅 비어 있는 것이오."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군 제1군은 4월 14일 부산진 전투 이후 불과 20일 만에 조선의 수도에 무혈입성했다.
같은 시기의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살펴보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5월 1일 출병회의를 열었다.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 홍양 현감 배흥립, 녹도 만호 정운 등이 모인 이날 회의에서 '모두가 혼연일체로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서자'는 각오를 다졌다. 회의를 마치고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모두 분격해 제 한 몸을 잊는 모습이 실로 의사들이라 할 만하다"고 기록했다.
반면 원균의 경상우수영의 군기는 엉망이었다. 병선만 하더라도 좌수영보다 두 배나 많았는데도 제대로 된 방어 한번 못 했고, 심지어는 전투선과 병력이 한순간에 증발해버리는 일도 벌어졌다.
밤바다에 뜬 조선 어선의 불빛을 보고 '적의 전투선'으로 오판해 아군 전투선 70여척과 식량, 무기까지 수장시켜 버렸다. 원균은 또 수군 6000여명을 해산하고 자신은 박홍, 이일, 김명원의 무리와 함께 남해도南海島로 피난했다. 이를 두고 류성룡은 「징비록」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전투선 100여척을 가라앉히고 1만명의 병력을 해산했다"는 비난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순신은 5월 2일 일기에 "남해 현령, 미조 항첨사, 상주포 만호, 곡포 만호, 평산포 만호 등이 하나같이 왜적에 관한 소문을 듣고 달아나 버렸고, '군기軍器도 많이 버려서 남은 것이 없습니다'란 보고를 들으니 참으로 놀랍고도 놀랄 일이다"고 자신의 심경을 기록했다.
"경상도 바다로 간다! 출정을 준비하라!" 1592년 5월 3일, 이순신은 방답 첨사 이순신을 불러 이렇게 지시했다. 이런 와중에 여도진 소속의 수군 황옥천이 출정을 피해 집으로 도망가서 숨어버렸다. 이순신은 그를 잡아다가 목을 베어 효시했다. 거북선을 만들 때는 부하들과 동고동락하며 화합의 지도자상을 보여줬지만, 이번엔 '엄정한 군기'를 적용하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줬다.
다음날 새벽 2시를 갓 지나 전라좌수영의 수군함대는 일제히 뱃머리를 동쪽으로 맞췄다. 이날 동원된 병선과 인력은 판옥대맹선 24척 3130여명, 협판중맹선 15척 730여명, 포작소맹선 46척 1380여명 등 총 85척 5400여명이다.
사실 이날의 수군함대는 모두 85척이었지만 병선이라고 할 만한 건 판옥대맹선 24척에 불과했다. 중맹선이라고 해봐야 경쟁력은 별로였고, 포작선(판옥선의 보조선)은 어부가 쓰던 배를 임시로 징발해 전투용으로 수리한 것에 불과하다.
이순신은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고 산같이 무겁게 하라"는 명령과 함께 함대를 몰고 평산포 상주포를 지나 미조항 창선도(경남 남해군)를 거쳐 고성의 사량도(경남 통영시) 앞바다로 다가갔다.
5월 5일, 이순신 함대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기로 한 미륵도 남서쪽 당포에 도착했다. 하지만 원균은 도착해 있지 않았다. 결국 이순신은 빠른 배편으로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공문을 보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