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계약서? 난 몰라” 제 시급 못 받는 노인들
김나현 2023. 4. 30. 19:05
7시간 전단지 돌리고도 5만원
고령자 법지식 미비 약점 악용
휴게시간·임금 서면 명시 안 해
모델하우스 현장 ‘호객 알바’는
실적 못 채우면 다음 날 일 못해
끼니 거르는 경우도 다반사
“양질의 노인일자리 창출 시급”
고령자 법지식 미비 약점 악용
휴게시간·임금 서면 명시 안 해
모델하우스 현장 ‘호객 알바’는
실적 못 채우면 다음 날 일 못해
끼니 거르는 경우도 다반사
“양질의 노인일자리 창출 시급”
“오죽하면 할머니가 이러고 있을까요. 오늘은 한 명도 못 받아서 점심도 못 먹었네요.”
4월27일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오후 3시. 서울 강남역 2번 출구부터 4번 출구까지 200m 남짓 되는 거리에 60∼70대 여성 10여명이 20m 간격으로 늘어서 행인들의 눈치를 연신 살폈다. 내리쬐는 햇볕 사이로 기다란 챙모자를 쓴 이들의 양손에는 서울로부터 180㎞ 떨어진 ‘오션뷰’ 레지던스 홍보 전단과 사은품이 들어찬 대형 봉투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눈이 마주친 행인에게 다가가 홍보 전단과 사은품을 권하는 노인들은 모델하우스(분양 홍보관) 호객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인 김정순(가명·73)씨는 점심도 거른 채 행인이 보이면 덥석 붙잡았다. 하루 8명 이상을 인근 분양홍보관에서 상담받게 해야만 다음 날도 일할 수 있어서다. 행인이 홍보관 입구에서 개인 신상정보까지 적어야 김씨의 실적으로 인정됐다. 김씨의 눈길을 피하며 지나치는 이들에게 보통 사정해서는 실적을 채우기 어려웠다. 김씨 근방 두 명의 노동자도 끼니를 거르긴 마찬가지였다. 호객은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7시간 동안 이어졌다. 하루 끝에 휴게시간 1시간을 제외한 6만원의 임금이 주어졌다. 이 모든 근로계약 사항을 담은 ‘일용직 근로계약서’ 작성은 애초부터 이뤄지지 않았다.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17조에 따르면 사용자는 근로자와 계약 체결 시 근로·휴게 시간, 업무 내용, 임금 등의 사항을 서면으로 명시해야 한다. 위반 시 500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 하지만 고령 노동자의 경우에는 법적 보호사항을 잘 몰라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다 보니,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적잖다. 노인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30일 서울 노원구 일대에서 개업한 음식점 홍보 전단을 나눠주던 이모(71)씨 역시 근로계약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이씨는 “전단지 800장을 모두 나눠주면 5만원을 받는다”며 “벌써 6시간 넘게 나눠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200여장 더 남은 전단 뭉치를 꺼내 보였다. 이씨의 일일 근로시간을 최소 7시간으로 산정할 때 시급은 7000원 수준으로, 2023년 최저시급 9620원을 훨씬 밑돌았다. 이씨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잘 써주지 않는다”며 “용돈벌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호소했다. 장진나 노무법인 현율 대표노무사는 “일용직 근로자들은 하청업체를 통해 고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모두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근로자”라며 “고령의 근로자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고령 노동자의 열악한 근로 환경과 달리, 노인의 근로 욕구는 점점 늘고 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2025년에는 5명 중 1명이 노인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 통계청이 발간한 ‘2022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65∼79세 고령자(685만6000명) 중 절반(54.7%)이 근로 의사가 있다. 이는 10년 전보다 10%포인트 이상 증가한 수치다. 이들이 취업을 원하는 사유로는 ‘생활비 보탬’(53.3%)이 가장 높았다.
정부도 이러한 목소리에 힘입어 노인 일자리 창출에 힘쓰고 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보건복지부 지원 하에 양질의 노인 일자리 개발에 나섰다. 하지만 공공기관과 일자리 연계가 이뤄져도 단순 노무에 치중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우체국을 퇴직해 전문 역량이 있는 고령 노동자가 정작 우체국에서 일을 할 때는 택배 상자 전달 업무만 시키는 식이다. 김문정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연구원은 “양질의 노인 일자리란 임금을 포함해 안정적인 근로 환경을 기반으로, 노인 삶의 질 개선까지 이어져야 한다”며 “노인의 직무 역량과 욕구에 맞춘 취업 서비스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했다.
김나현 기자 lapiz@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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