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부인’ 가네코·‘일본의 쉰들러’ 후세… 일본인 최초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박수찬 2023. 4. 3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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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30일 일본인으로서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이 시작된 1992년 1월 이래 일본인이 선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해 일본으로 돌아가 무정부주의자가 됐고, 1922년 도쿄에서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 의사를 만나 항일운동에 동참했다.

가네코 선생과 함께 선정된 후세 선생은 훗날 '일본의 쉰들러'로 불린 인권변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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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日 식민정책 반기, 韓 독립 도와”
가네코, 박의사와 함께 친일파 응징 활동
후세, 2·8선언 체포 조선인 변호 등 맡아

국가보훈처는 30일 일본인으로서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이 시작된 1992년 1월 이래 일본인이 선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훈처는 이들이 인권과 정의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따라 일제 식민지 정책에 반기를 들고 한국 독립을 도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을 통해 널리 알려진 가네코 선생은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친척 집을 전전하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 고모의 양녀로 들어가 충북 청원 부용면(현 세종시 부강면)에 살다가 1919년 3·1운동을 겪으며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에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일본으로 돌아가 무정부주의자가 됐고, 1922년 도쿄에서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 의사를 만나 항일운동에 동참했다. 일본에서 한국인들이 조직한 사회주의·무정부주의 운동 단체인 흑도회(黑濤會)에 참가하기도 했다. 박 의사와 더불어 흑도회 기관지 ‘흑도’를 창간하고 친일파 응징 등 활동을 펼쳤다.
가네코 후미코(왼쪽), 후세 다쓰지.
1923년 간토 대지진 후 일본의 조선인 탄압 과정에서 연행됐다가 연인이던 박 의사의 폭탄 구입 계획이 드러나며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다. 1926년 2월 열린 공판 당시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신의 이름을 조선식으로 ‘박문자’라고 밝힌 그는 재판부의 사형 선고에 ‘만세’를 외쳤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옥중에서 박 의사와 결혼했으나, 1926년 7월 23세 젊은 나이에 숨졌다. 유해는 남편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묻혔다. 사후 92년 만인 2018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가네코 선생과 함께 선정된 후세 선생은 훗날 ‘일본의 쉰들러’로 불린 인권변호사다. 1879년 오사카에서 출생한 그는 1919년 도쿄 2·8 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최팔용, 백관수 등 조선인 9명의 변호를 맡으며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1923년 8월 한국을 방문해 ‘인간 생활의 개조 운동과 조선 민족의 사명’이란 주제로 강연회를 가졌다. 간토 대지진 당시 대규모 조선인 학살이 벌어지자 해당 사건을 조사해 학살 책임이 일본 정부에 있음을 밝히려 했으나 일본 당국의 방해로 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못했다. 박열·가네코 부부의 변론을 맡아 법정에서 싸웠고, 가네코 선생이 숨진 뒤 그 유해를 수습해 한국으로 운구했다.

이후로도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지속적으로 변호하다 1932년 법정모독 혐의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1933년에는 신문지법, 우편법 위반으로 금고 3개월 실형도 선고받았다. 일제 패망 후 다시 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새로운 평화헌법 보급, 재일 조선인 권리 보호 등에 매진하다가 1953년 타계했다. 우리 정부는 2004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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