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전 칼럼] 집을 나온 노라는 어디로 갔을까?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남편 헬메르: 최악이군! 가장 신성한 의무를 모른 척하겠다는 거야?
부인 노라: 내가 가장 신성하게 지켜야 할 의무가 어떤 거지요?
헬메르: 꼭 말해야 알겠어? 남편과 아이들 아닌가?
노라: 나에겐 다른 의무가 있어요. 똑같이 신성한.
150년 전, 노라는 이렇게 말하고 ‘인형의 집’을 나왔다.
가족은 오랫동안 힘들 때 우리를 보듬어주는 마지막 피난처요 안식처다. 그러나 가족은 가해자이기도 하다. 실제로 매년 가정폭력 신고 건수는 20만건이 넘고, 아동, 노인, 성폭력의 주된 가해자는 가족이다. 푸른이가 열두살 때부터 하루 네다섯번 치매 할머니의 배설물 기저귀를 갈아야 했던 이유도 그가 가장 힘없는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성공에 가족의 배경과 재산이 절대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34살 이하 청년 가구주의 경우, 상위 10%군의 순자산이 하위 10%에 비해 약 350배나 많다(2021). 얼마 전 타계한 이건희 회장의 사례처럼, 단지 재벌 아버지를 두었다는 이유 하나로 14조원(상속세 제외)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을 정의롭다고 해야 할까? 한 나라의 자본총량이 그해 소득의 몇년치에 해당하는지를 보는 측정치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민순자산 배율은 9.6배(2021)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제 가족은 불평등을 만드는 주요 원인이자 가족 뒷배 없는 청년세대의 절망과 분노의 발화지가 되고 있다.
가족은 사회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지만, 그 경계는 피아를 구분하는 역할도 한다. 박노자의 말처럼 한국 사회의 비극은 연대가 가족에서 멈춘다는 것이다. 더욱이 가족 내 연대의 강화는 자녀의 친구마저 경쟁자로 간주하고, 가족 밖 사람들에 대한 배제, 혐오로 발전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열두살 푸른이에게 무거운 간병의 짐을 지운 이들은 일차적으로 부모지만, 경제성장을 빌미로 마땅히 정부가 해야 할 복지의 책임을 오랫동안 가족들에게 미루어 온 개발독재 정권의 책임이 크다.
이런 가족에 과감하게 ‘짱돌’을 날리는 이가 있다. 미국의 작가 소피 루이스는 가족은 서로를 돌보고 환대해줄 세상의 대안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며 ‘가족의 폐지’를 주장한다. 그에게 가족은 문제들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경제의 축소판이고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돌봄을 사적인 문제로 환원시키는 단어일 뿐이다. 가족애, 효, 자식 사랑 등의 각종 서사는 ‘도움이 되는’ 가족이 있고, 그런 가족으로부터 편익을 누리는 이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가족을 폐지할 수 있을까? 벼룩 잡으려 초가삼간 태우는 일은 아닐까? 다른 방법을 시도한 이도 있다. 스웨덴은 기존 가족의 경계를 부수고 가족을 국가로 확대했다. 스웨덴을 복지국가로 만든 페르 알빈 한손 총리가 주도한 ‘인민의 집’(the People’s Home) 프로젝트다. 그는 말했다. “좋은 집은 개인들이 특권을 가지거나 또는 경시당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선호하는 자식이나 의붓자식도 없다. (…) 누구도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이득을 취하지 않으며, (…) 좋은 집에는 평등, 이해, 협력, 도움이 있다.”
10여년 전 스웨덴 대사관에서 만난 한 고위 관료는 스웨덴인은 부모가 자식에게 부양을 받을 생각도, 자녀가 부모를 부양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국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족애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순수한 것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고 보니 스웨덴은 넓은 땅을 가지고 있지만 가족들은 한 묘지에 묻힌다. 페르 알빈 한손 총리도 스톡홀름 북부 공동묘지에 그의 애인, 딸과 함께 누워 있고 그 옆 묘지번호 228번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주연배우 잉리드 베리만(잉그리드 버그먼) 역시 가족 4명과 함께 누워 있다.
그러나 확대된 가족의 경계는 궁극적으로 국가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다 보면 가족 확대와 가족 폐지가 만나게 되리라. 가족을 확대하든 폐지하든, 경계, 껍질을 깨는 일은 늘 두렵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국내 1인 가구 비율은 15.5%(2000)에서 33.4%(2021)로 늘었다. 가족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고령화와 맞물려 가족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간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부유한 가족을 중심으로 설계된 돌봄 등 각종 사회정책을 무력화시킬 것이다.
가족이 없으면 어쩌느냐 걱정이 된다면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시라.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집을 나온 노라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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