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지방선거 여성 약진’에 거는 기대
[세계의 창] 야마구치 지로
일본 호세이대 법학과 교수
일본에서 남녀평등 사회의 실현이 정책 목표가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0여년 전이다. 근대 일본에서는 남녀의 역할 분담이 당연한 질서로 여겨졌고, 여성은 결혼한 뒤 가정에서 남편과 아이, 경우에 따라서는 시부모를 돌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돼왔다.
하지만 이런 성 역할 분담은 오랜 역사 속에서 아주 최근의 현상이다. 일본이 가난한 농촌사회였던 시대에는 남녀의 구분 없이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었다. 전업주부라는 생활방식이 자리 잡은 것은 일본이 어느 정도 경제발전을 이룬 20세기에 들어서다. 일본의 보수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이른바 ‘전통’이라는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것이 적지 않다.
어쨌든 1970년대 이후 여성의 사회 참여가 정치·경제의 양면에서 요구되기 시작했다.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이 늘어남과 동시에 이들 자신이 사회에서 자아실현을 하길 원했다. 기업도 여성의 노동력이 필요하게 됐다. 정치 분야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정부와 국회의 대표자들이 남성들로만 편중될 경우 정책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교육이나 보육, 돌봄 등의 정책이 뒤로 밀려 국민이 살아가기 힘들게 될 것이라는 견해다.
1980년대 이후 일본 출생아 수는 계속 감소하고 있다. 빠른 저출생 속도에 사회 전체적으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인구 감소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당연해지는 흐름과 함께 낡은 성 역할 분담을 전제로 한 사회 구조 사이의 모순이 초래한 결과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일하는 시대가 됐지만 육아나 가사의 대부분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일본에선 육아를 사회 전체가 지원하는 제도의 정비가 늦어졌다. 1990년대 이후 출생률 저하에 대응하기 위해 어린이집 등 보육시설을 늘리는 정책이 확충된 것은 사실이지만, 가정 내 남녀의 역할 분담은 ‘남성=일, 여성=가정’이라는 과거의 통념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오랫동안 일본을 통치하고 있는 자민당은 남녀평등 실현을 표방하고 있지만 여성의 자율적인 삶의 방식을 이념적 차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선택적 부부별성제’를 둘러싼 여론과 자민당의 의식 차이다. 일본 민법에서는 부부는 동일한 성을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99%는 남편의 성을 따르고 있다. 독립적인 삶의 방식을 원하는 여성들은 부부가 서로 다른 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민법을 개정해달라고 지속해서 요구해왔다.
하지만 자민당은 ‘선택적 부부별성제’는 일본의 전통적인 가족상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일관되게 반대하고 있다. 자민당의 여성 의원 중에는 결혼한 뒤에도 미혼 때 사용하던 성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법률상 성은 아니다. 법률적으로 자신의 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여성을 우습게 보는 처사일 뿐만 아니라, 재산의 보유나 해외여행 등 여러 분야에서 큰 불편을 겪게 된다.
정계는 경제계보다 여성의 진출이 더뎠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도 있다. 올해 4월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사나 시장, 지방의원을 뽑는 ‘통일 지방선거’가 있었다. 이번에 많은 여성 정치인이 새롭게 탄생했다. 일본 국회는 자민당의 ‘일강체제’가 계속되고, 여성 의원도 적다. 하지만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질 경우 유권자들은 새로운 선택을 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중앙정치 차원에선 정권교체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지방정치에서 많은 여성이 진출하고, 그 여성 정치인들이 정책을 쇄신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전통이나 관행, 제도 등의) ‘사슬’에 묶여 있는 여성들이 스스로를 해방시켜 나가는 에너지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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