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다운 약을 우리 손으로"…이종호 JW그룹 명예회장 별세
(지디넷코리아=조민규 기자)‘제약보국’(製藥保國)에 앞장서 온 이종호 JW그룹 명예회장이 4월30일 노환으로 영면(향년 90세)에 들었다.
1932년 12월1일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이종호 명예회장은 1945년 광복둥이 기업으로 탄생한 JW중외제약에서 ‘제약구세’(製藥救世)의 일념으로 필수의약품부터 혁신신약까지 ‘약 다운 약’을 만들어 국민 건강을 지키는 제약보국 실현에 앞장섰다. 특히 ‘생명존중’과 ‘도전정신’의 경영이념 아래 대한민국 제약 산업의 발전과 보건의료 기반 향상에 평생을 바쳤다.
1966년 회사의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이종호 명예회장은 1969년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합성 항생제 ‘리지노마이신’ 개발에 성공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리지노마이신은 국내에서 선풍적인 반응을 이끌었으며, 경영위기로 어렵던 회사의 기틀을 다지고, 국내 제약 산업을 한 단계 진보시키는 역할을 했다. 1973년 12월 영국 약전(B.P)에도 수록됐고, 1969년 5월19일 발명의 날에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항생제 합성 분야에서 큰 성공을 이룬 이 명예회장은 1974년 당시 페니실린 항생제 분야 최신 유도체로 평가받던 피밤피실린의 합성에도 성공, ‘피바록신’을 개발하며 기술력을 입증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해외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국내 제약 산업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머크, 애보트 등 유럽 및 미국 주요 제약사들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국내 시장에서 기술적 입지를 굳혀나갔으며, 이들과의 협업을 통해 전문 치료의약품 중심의 사업을 확대했다.
1970년대 초반에는 기초원료 합성과 생산을 위한 연구에 집중, 국내 최초 소화성궤양 치료제 ‘아루사루민’, 진통·해열제 ‘맥시펜’, 빈혈치료제 ‘훼럼’, 종합비타민 ‘원어데이’ 등 신제품들을 시장에 선보이며 포트폴리오를 확장해 나갔다.
1993년 2월에는 제14대 한국제약협회장에 취임하며 ‘기업윤리관 확립’, ‘환경변화 대응능력 배양’, ‘협회의 조직기능 효율화와 위상 제고’ 등 3대 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약가관리체계 자율화, 건전한 납품질서체계 확립, 회전기일 단축과 적정이윤 확보를 비롯하여 윤리위원회 설치와 자정운동 강화, 신약개발 지원정책 마련, 각종 행정규제 완화 등의 다양한 사업들을 전개했다.
이윤이 남지 않더라도 내 나라 국민을 치료하는 약은 내가 만든다
“팔수록 손해 보는 수액 포기하려다, 병원 불빛보면 마음 바뀌어” 이종호 명예회장은 회사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수액 산업 분야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 명예회장은 1970년대에 수액 한 병 납품할 때마다 원가(原價)가 안 나와, 팔수록 손해인 수액사업에 대해 사업을 이어갈지 고민했다. 하지만 병원 불빛을 보며 “지금 이 순간에 저기서 꺼져가는 생명이 있는데 싶은 마음이 들면서 돈이 안 돼서 그만둔다는 건 말이 안 된다”라며 선친이 몸소 실전했던 생명존중의 창업정신을 이어가 오늘이 됐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JW그룹은 1997년에 국내 최초로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지 않는 Non-PVC 수액백 개발에 성공, 친환경 수액백 시대를 열었으며, 2006년에는 1600억 원을 투자해 충남 당진에 세계 최대 규모의 수액제 공장을 신설, 글로벌 생산 기지를 구축했다. 당시 이 명예회장은 “내가 충남 당진에 1600억원 들여서 한 개에 1000원 정도 하는 수액 생산 공장 짓는다니깐 ‘우리 시대의 마지막 바보’라고 했다”고 말했다.
JW그룹은 당진 수액공장을 기반으로 2019년에는 자체 기술력으로 개발한 3체임버 종합영양수액 ‘위너프’(수출명: 피노멜) 완제품을 아시아권 제약사로는 최초로 영양수액 세계 최대 시장인 유럽 시장에 수출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75년 당시 중외제약의 사장으로 취임하며 이종호 명예회장이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신약개발’이었다. 여기에는 “생명을 다루는 제약기업은 이윤도 중요하지만 약다운 약을 생산해야 한다”라는 창업정신이 밑바탕 됐다.
이 명예회장은 “신약 개발로 벌어야지. 해외에 있는 약을 수입해서 판매해 이윤을 많이 남긴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그는 지난해 3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신약 개발한다니까 예전에 한 보사부 장관이 ‘안 될 일에 왜 자꾸 돈을 쓰느냐’고 말리더라고요. 그때 내가 그랬어요. ‘반도체 누가 만들었어요?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거 아닙니까?’라고. 반도체를 만드는 한국 사람은 있는데 신약 개발하는 한국 사람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돼요. 같은 서울대학 나와서 왜 누구는 반도체를 만드는데 왜 약은 못 만들어. 내 생각은 확고해요. 단지 이런 건 있지.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R&D에 투자했듯이 오너가 투자를 해줘야 하는 거거든요. 의약업계에서도 누군가 하면 돼요. 20년이고, 30년이고 실패를 하더라도 지치지 말고, 그게 신약 개발의 키워드야”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신념으로 이 명예회장은 R&D 역량을 키우기 위해 국내에 신약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1983년 중앙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86년에는 신약개발 연구조합 초대 이사장에 추대돼 업계 공동 연구개발을 통한 기술 향상과 글로벌 진출 기반 구축 등 국내 제약업계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1992년에는 오늘날 오픈 이노베이션의 시초라 할 수 있는 국내 최초의 합작 바이오벤처인 C&C신약연구소(현 JW중외제약 지분 100%)를 일본 주가이제약과 50대 50 지분 투자를 통해 설립했다. 이종호 명예회장은 설립 당시 “대한민국의 인재와 일본의 신약개발 노하우를 합쳐 제대로 된 신약을 만들어보자”라는 취지를 밝혔다.
이 밖에도 2000년에는 미국 시애틀에 연구소인 JW 세리악(Theriac, 현재 미국 보스턴 소재)를 설립하는 등 글로벌 R&D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를 발판 삼아 2001년에는 국내 최초의 임상3상 신약 1호인 항생제 ‘큐록신’ 허가를 획득하는 성과를 냈다.
JW중외제약은 오늘날까지 그 정신을 이어받아 혁신신약 중심의 R&D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치료의약품의 개발에 힘쓰고 있다. 주요 신약 후보물질 가운데, 기술수출에 성공한 아토피피부염 치료제와 통풍 치료제는 글로벌 임상을 진행 중이며, 탈모치료제와 표적항암제 또한 임상 1상 진입을 목표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이 명예회장은 “꽃은 아직 안 피었지만, 꽃밭은 내가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된 거죠. 직원들 앞에서 내가 말한 적이 있어. 내가 죽기 전에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신약 개발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하지만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걸 개발할 수 있는 길이라도 닦아놓으면 나는 만족한다”고 말한 바 있다.
‘보건의료 학술연구 지원’ ‘소외 계층 지원’…중외학술복지재단 설립
이종호 명예회장은 2011년 사재 200억원을 출연해 공익재단인 중외학술복지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으로서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중외학술복지재단은 보건의료 분야 학술연구와 소외계층 지원을 위해 설립된 공익법인으로 지역사회 대상 봉사활동과 기초과학자 주거비 지원 사업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진행 중이다.
2013년에는 창업자인 故성천 이기석 선생을 기리고 고인이 평생 실천했던 생명존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성천상’을 제정, 음지에서 헌신적인 의료봉사를 통해 의료 복지 증진에 기여하며 사회적 귀감이 되는 의료인을 발굴해 그 업적을 기리고 있다. 지난해까지 총 9명의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이 명예회장은 “JW중외제약이 기초수액과 같은 필수의약품 생산과 공급으로 인류의 건강문화 향상에 도움을 주는 것처럼 장애인도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사회를 밝게 만드는 존재”라는 지론 하에 사회적 약자들이 차별 없이 문화 활동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2015년 국내 최초 기업 주최 장애인 미술 공모전인 JW아트어워드를 제정, 장애 예술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과 장애인 작가들의 작품 활동 환경 개선에 기여하고 있다.
이 외에도 2003년도부터 ‘악보를 읽을 수조차 없는’ 중증 장애인들로만 구성된 합창단 ‘영혼의소리로’를 후원하고 있다. 후원회장으로서 이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결과, 합창단은 2009년 유럽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안톤 브루크너 국제 합창대회에 직접 참가, 세계인 앞에서 한복을 입고 멋진 공연을 선사하기도 했다.
조민규 기자(kioo@zd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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