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수무책 원화약세 … 기업들 "중간재 수입 늘어 팔수록 손해"
세계 불황에 수출 고꾸라지고
한미 금리차 커지며 외화 유출
4월 배당금 송금 28억弗 달해
컴퓨터·전자·광학기기 업종
수입 중간재 비중 53% 넘어
원화 환산비용 역대 최고수준
◆ 원화 역주행 ◆
달러화의 강세 기조가 멈춘 뒤에도 이례적으로 원화 약세가 이어지며 힘을 못 쓰고 있다. 반도체와 대(對)중국 수출 부진으로 무역적자가 13개월째 계속되고 있고, 경상수지마저 두 달 연속으로 적자가 나는 등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이 약해진 것이 첫 번째 이유다. 30일 매일경제가 국제결제은행(BIS)의 국가별 통화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원화의 실질실효환율은 3월 기준 94.79로 올 들어 3.6% 하락했다. 비교 대상 63개국 가운데 실질통화절하율이 5위에 달했다. 일본(-1.9%), 중국(-1.3%), 대만(0.1%) 등 주변 국가와 비교해도 통화가치 낙폭이 큰 편이었다. 실질실효환율이란 세계 교역 비중 등을 감안해 구매력 기준으로 각국 통화의 실질적인 가치를 측정한 지표다.
전 세계 경기 침체에 수출이 고꾸라지며 한국은 무역을 통해 외화가 유출되고 있다. 이 때문에 원화값도 덩달아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 들어 4월 20일까지 수출액은 1년 새 12.3% 줄었고 무역적자는 266억달러로 늘었다. 1년의 절반이 채 지나기도 전에 지난해 적자(478억달러)의 55.6%에 달할 정도로 적자 규모가 커졌다. 과거 원화가 달러화와 보폭을 맞춰 움직일 땐 국내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 덕에 경상수지가 흑자였다. 외환 트레이더들 사이에선 "경상수지 적자 쇼크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며 "역내외시장에서 달러화 매도 물량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특히 4월은 한국 기업(12월 결산법인)에 투자하는 외국인들이 배당금 송금에 나서는 시기라 원화 약세가 심화됐다는 분석이다.
한국은행 국제수지 분석 결과 배당금 등의 유출입을 보여주는 본원소득수지는 최근 10년간 매년 흑자(연평균 101억2207만달러)를 기록했지만 유독 4월에는 적자로 돌아서는 흐름이 강했다. 매년 4월 평균 본원소득수지 적자는 28억8189만달러로 올해도 비슷한 규모로 해외 송금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 이후 최대 수준으로 벌어진 한미 간 기준금리 차(1.5%포인트) 역시 외국인 자본 유출을 자극하는 포인트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의 국내 채권 투자자금(250억달러)이 1년 새 66.2%나 급감했다. 올 1~2월에도 1억7000만달러가 빠져나가는 등 자금 유출이 원화 약세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원화 약세 속에 기업들이 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중간재와 자본재 가격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랐다는 점이다. 더 많은 외화를 주고 재료를 사와야 하는 만큼 기업 수익성에 비상이 걸렸다. 비용 증가에 따라 수출이 추가적으로 둔화되는 '악순환'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한은에 따르면 원화로 환산한 수입 중간재 가격지수는 지난해 138.71(2015년 100 기준)로 1년 새 19.6% 뛰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자본재 가격도 8.3% 올라 역대 세 번째 수준으로 비싸졌는데 올 1분기에도 고공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한 중견 제조업체 관계자는 "올 들어 원화값 하락에 해외에서 장비를 사는 데 들어가는 돈이 천정부지로 늘었다"며 "생산을 늘려도 수지가 맞지 않는 상태"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국이 세계 공급망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중간재 수입 비중은 점차 늘고 있다. 전기·전자·운송장비 등 국내 주력 업종에서 중간재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41.4%(2019년 기준)에 달한다.
컴퓨터·전자·광학기기 중간재 가운데 수입품 비중은 53.4%로 절반을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한국 수출구조가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바뀌며 저가 제품으로 가격 경쟁을 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원화값이 하락하면 수출이 늘어난다는 공식도 깨졌다"고 지적했다. 이소라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제품 기술을 고도화하고 공급망에서 주도적 지위를 확보하면서 내수 부문을 키워 내수와 해외 부문이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장에서는 앞으로 원화의 향방을 가를 주요 변수로 오는 4일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기준금리 결정과 일본은행(BOJ)의 금융정책 변화 등을 꼽고 있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5월 FOMC가 차익실현 계기로 작용하면서 원화 약세가 다소 진정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BOJ가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 전환에 나설 경우 엔화가 강세로 돌아서고 달러화 약세가 가속화하면 원화가치 상승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김정환 기자 / 임영신 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내 카드서 돈 술술 빠진다”…모르고 했다가 낭패보는 ‘이것’ - 매일경제
- 들었다 하면 품절…38만원짜리 ‘김건희 순방백’ 뭐길래 - 매일경제
- ‘네쌍둥이’ 경사도 잠시…산후도우미 지원자 없어, 한달간 발동동 - 매일경제
- 1065회 로또 1등 14명…당첨금 각 18억5000만원 - 매일경제
- 檢, 송영길 개인조직까지 압수수색...‘9400만원+α’로 커지는 돈봉투 의혹 - 매일경제
- 김 투자해 金 만드는 사모펀드들 "짭짤하네" - 매일경제
- 빚내서 투자하고 영끌했다가…빚더미에 앉은 청년들 - 매일경제
- 루이비통은 한강, 구찌는 경복궁…한국으로 몰려온 명품들 - 매일경제
- 성추행당한 아내에게 남편이 “그거 좀 만졌다고 난리”…이건 심했다 - 매일경제
- 듀란트, 나이키와 종신계약...MJ-르브론에 이어 세 번째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