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 위해 싸운 두 일본인.. '5월의 독립운동가'되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였던 조선의 편에 서서 싸운 일본인이 '5월의 독립운동가'가 됐습니다.
국가보훈처는 일본인이었지만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가네코 후미코 선생과 함께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후세 다쓰지 선생은 '일본의 쉰들러리스트'라고 불리는 인권변호사입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조선을 사랑한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日 쉰들러리스트'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
"일본인으로서 정의의 편에서 인류에 헌신"
일제 강점기 식민지였던 조선의 편에 서서 싸운 일본인이 '5월의 독립운동가'가 됐습니다.
국가보훈처는 일본인이었지만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가네코 후미코 선생은 지난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이후 한국인 유학생들이 만든 흑도회(黑濤會)에 몸담고, 노동자 후원과 친일파 응징 활동, 무정부주의 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일본의 조선인 학살 과정에서 남편과 함께 연행됐다가 박 의사의 폭탄구입 계획이 드러나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당시 법정 심문에서는 "나는 천황이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인간이지 결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폭탄을 던져 천황도 우리와 똑같이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926년 2월 도쿄 대심원 법정 공판에서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신의 이름은 '박문자'라고 밝힌 가네코 후미코 선생은 사형 판결 즉시 '만세'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옥살이 도중인 1926년 7월 23살의 나이로 옥사했습니다.
일제는 사망 원인을 자살이라고 했지만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 선생의 유해는 남편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묻혔습니다.
이후 옥사 92년 만인 지난 2018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습니다.
가네코 후미코 선생의 이야기는 지난 2016년 영화 '박열'에서 다뤄지기도 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 선생과 함께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후세 다쓰지 선생은 '일본의 쉰들러리스트'라고 불리는 인권변호사입니다.
1879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후세 다쓰지 선생은 1919년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재일조선인 유학생들과 '국가 전복 모의' 혐의를 받은 박열·가네코 부부를 대신해 법정에서 싸웠습니다.
가네코 후미코 선생의 유해를 거둬 한국으로 운구한 것도 후세 다쓰지 선생이었습니다.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정의의 편에 서서 보편적 인류애를 실천한 후세 다쓰지 선생은 1932년 법정 모독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일제 패망 후 다시 변호사로 활동한 후세 다쓰지 선생은 새로운 평화헌법 보급과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투쟁에 매진하다 195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부는 후세 다쓰지 선생에게 지난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JIBS 제주방송 이효형 (getstarted@hanmail.net) 기자
Copyright © JIB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