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섭의 MLB스코프] 하퍼·마차도 동기→만년 유망주, 17.6% 확률을 뚫고 쓴 기적
[스포티비뉴스=이창섭 칼럼니스트] 마이너리그 선수들에게 메이저리그는 까마득한 곳이다. 마이너리그의 수많은 레벨을 거쳐야만 올라갈 수 있으며, 이마저도 팀 사정이 허락되지 않으면 데뷔를 장담할 수 없다.
마이너리그 전문 매체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1981년부터 아마추어 드래프트 자료를 관리하고 있다. 2019년 발표 자료에 따르면 1981년에서 2010년까지 드래프트 지명자들 중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선수는 17.6%에 불과하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 현상은 최근 메이저리그가 유망주 수집에 열을 올리면서 더 심화됐다. 과거의 유망주는 유망주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웬만한 메이저리그 선수보다 더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유망주가 각 팀들의 현재 자산이자 미래 자산이다. 이에 일반 마이너리그 선수들은 시기를 놓치면 곧바로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고, 끝을 알 수 없는 고독한 싸움을 시작한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드류 매지(34)는 2010년 드래프트 출신이다. 피츠버그가 15라운드에서 지명했다. 매지와 함께 뽑힌 드래프트 동기들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고 있다. 브라이스 하퍼(1순위)와 매니 마차도(3순위) 크리스 세일(13순위) 크리스찬 옐리치(23순위)가 매지의 동기들이다. 이는 2010년 드래프트가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 알 수 있다.
매지는 피츠버그에 입단한 2010년 상위싱글A에서 뛰었다.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더블A에서 가로막혔다. 2012년에 올라갔지만, 2015년까지 계속 더블A에 있었다. 더블A 통산 463경기 타율 0.257 7홈런은 확실히 만족스러운 성적이 아니었다.
그 사이 매지는 구단도 옮겼다. 마이너리그 FA 신분으로 2015년 LA 에인절스 더블A 팀에 들어갔다. 매지는 여러 팀들을 전전했다. 그러나 제대로 안착한 팀은 없었다. 2016년 LA 다저스에서 트리플A까지 나아갔지만, 전력이 두터운 다저스 메이저리그 팀에 매지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매지가 꿈의 무대에 가까이 다가선 건 2021년 9월이었다. 미네소타 트윈스는 롭 레프스나이더가 팔꿈치 부상으로 이탈하자 매지를 등록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경기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매지는 이틀 뒤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다. 실망할 수 있었지만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매지는 "나는 어떠한 일도 좋거나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냥 일어난 일이다. 되돌아봤을 때 그 일을 통해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매지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트리플A팀과 계약했다. 그런데 시즌 중반 트레이드로 팀을 이적했다. 친정팀 피츠버그였다. 소식을 들은 매지는 운명처럼 성사된 피츠버그행에 깜짝 놀랐다. 매지는 시즌이 끝나고 나서도 피츠버그와 마이너 계약을 체결했다.
긴 여정을 마치고 가장 친숙한 팀에 돌아왔지만, 사실 피츠버그는 매지에게 어울리는 팀이 아니었다. 리빌딩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팀으로, 젊고 잠재력이 높은 유망주들이 팀의 중심이었다. 메이저리그 데뷔를 목표로 하는 매지가 기회를 받을 수 있을지 불투명했다. 심지어 누군가는 스프링캠프에서 매지를 보고 "코치인 줄 알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매지는 스프링캠프에서 최고의 성적을 냈다. 26경기 타율 0.344 3홈런 9타점을 올렸다. OPS 1.105는 15경기 이상 출장한 피츠버그 선수 중 두 번째로 좋았다(트래비스 스웨거티 1.161). 하지만 스프링캠프 마지막에 매지를 기다린 곳은 마이너리그였다. 이미 메이저리그 로스터는 구상이 끝난 상태였다. 이번에도 매지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몸이 허락하는 한 유니폼을 입을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기회는 항상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러나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 마이너리그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매지는 그토록 기다리던 팀의 부름을 받았다. 피츠버그는 브라이언 레이놀즈가 가족 문제로 자리를 비우자 매지를 승격시켰다. 믿을 수 없었던 매지는 구단이 보낸 운전사에게 "그들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데려달라"고 웃으며 부탁했다.
메이저리그에 올라왔지만, 메이저리그 데뷔는 확신할 수 없었다. 순위 경쟁을 하고 있는 피츠버그는 한 경기도 놓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네소타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데릭 셸턴 감독은 매지를 내보내고 싶었지만, 무턱대고 기용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매지는 벤치에서 먼저 두 경기를 지켜봤다.
지난 목요일, 레이놀즈가 팀에 복귀했다. 구단 최초로 1억 달러 계약을 맺은 레이놀즈는 그 경기의 주인공이었다. 레이놀즈가 오면서 매지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런데 피츠버그는 매지를 남겨두고 캐넌 스미스-은지바를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냈다.
피츠버그는 매지를 잊지 않았다. 목요일 경기에서 다저스를 상대로 경기 후반 크게 리드하자 마침내 매지의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마련해줬다. 매지는 8회말 앤드류 매커친의 타석에서 대타로 들어섰다. 매지의 사연을 알고 있었던 관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매지의 간절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부모님도 붉어진 눈시울로 아들의 데뷔전을 환영했다.
무려 13년 만에 이루어진 메이저리그 데뷔전. 메이저리그 타석에 들어서기 위해 매지는 마이너리그 1155경기, 4494타석을 들어섰다. 그리고 약속대로 초구부터 방망이를 휘둘렀다. 타구는 매섭게 날아갔지만 파울이 됐다. 아끼지 않았던 스윙과 전력을 다한 상대 투수. 매지는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으로 1루까지 달려갔다. 수없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달렸던 매지의 야구 인생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다음날 매지는 3루수 8번타자로 선발 출장했다. 하지만 세 타석에서 안타는 치지 못했다.
이후 피츠버그는 미겔 안두하를 올리면서 매지를 내려보냈다. 그런데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시리즈가 더블헤더로 진행되면서 다시 매지를 올렸다. 더블헤더는 규정상 27번째 선수를 등록할 수 있었다. 극적으로 로스터에 남게 된 매지는 더블헤더 2차전 경기 중반 대타로 나와 그토록 기다린 첫 안타와 첫 타점을 기록했다.
매지는 어떠한 순간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선택받은 선수들의 무대에서, 선택받지 못한 선수의 존재감을 알렸다. 메이저리그에 머문 시간은 짧을지언정, 메이저리그에 남긴 여운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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