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심해진 사회복무요원, 재배정 요청하니 "자해해도 소용없어"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정신질환으로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은 이진훈(가명) 씨는 복무 중인 기관에서 업무를 수행하던 중 추가적인 우울증 상병을 진단받았다. 3개월간의 치료 끝에 복무기관 재배정을 신청했지만, 돌아온 말은 '어차피 안 될 것'이란 협박에 가까운 거절이었다.
이 씨를 담당하는 복무지도관은 이 씨를 만나 "샘플 하나를 보여줄게"라며 타 요원의 자해사진을 내밀기까지 했다.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서 이러한(자해를 한) 요원"도 있었는데, 그도 복무기관 재배정은 허락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병영법 제32조 1항 6호는 '복무기간 중 질병이나 심신장애의 발생 또는 악화로 인하여 복무하고 있는 기관에서 계속 근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인정되는 경우'를 복무기관 재지정 사유로 규정하고 있으나, 현재 이는 사회복지시설 및 장애학생 활동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요원들에게만 허용되고 있다. 이 씨의 근무지는 해당 시설에 속하지 않는다.
질환이 더 심해지면서 이 씨가 다시 한 번 근무지 재지정을 신청했지만, 지도관에게선 "나중에 필요하시면 신문고나 한 번 (하라)"는 말만 돌아왔다. 이후 이 씨는 국민신문고를 통해 병무청, 국가인권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감사원, 군인권센터 등 손이 닿는 모든 곳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 씨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노동조합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사회복무요원도 노동자이며, 모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설립할 권리가 있다." 그렇게 이 씨가 찾은 곳이 바로 '사회복무요원 노동조합'이다.
지난해 3월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낸 이들 노조는 당시 의정부지청이 "사회복무요원은 병역의무를 수행하는 이들"이라며 노조 설립을 반려하자 행정소송을 통해 단결권 보장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30일, 해당 노조는 이 씨와 같이 다양한 갑질 피해에 시달리고 있는 사회복무요원들과 함께 4월 30일을 '사회복무요원 노동자의 날'로 선포하며 사회복무제도 폐지 투쟁에 나섰다.
이날 오후 서울 영등포구 서울지방병무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이들은 △겸직제도 신고제로 전환 △중식비 인상 및 주거비용 지원 △행정분야 사복요 폐지방침 철회 △복무 중 괴롭힘 금지법 제정 △4급 판정 사유에 의한 업무 거부권 부여 △복무지도관 확충 및 고충해소 실현 △4급 판정 사유에 의한 유급병가 확대 △사회복무요원 최저임금 보장 △강제노동 폐지를 통한 ILO협약 준수 등 10개 요구사항을 병무청, 국회, 정부 등에 촉구했다.
특히 4급 사유에 따른 특정 업무 거부권 혹은 재지정 요청 권한 등은 요원들의 생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핵심적인 권리보장 요건으로 꼽힌다. 근무로 인한 우울증 추가발병을 호소했던 이 씨처럼, 지난 2016년에는 우울증으로 4급 판정을 받은 고(故) 최준 사회복무요원이 우울증을 심화시킬 수 있는 민원대응 업무를 지시 받았으나 거부권을 발휘하지 못했다. 당시 최 요원은 결국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날 현장을 연대 방문한 김설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심각한 허리디스크에 시달려 4급 판정을 받은 사회복무요원에게 고강도의 육체노동을 시키고, 우울증 환자에게는 민원대응 업무를 지시하는 등의 부당한 사례가 현장에 많다"라며 "(노조는) 부조리한 업무지시와 힘든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궁극적인 변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이날 '사복요 노동자의 날'을 선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회복무노조는 6만 명에 이르는 사회복무요원들의 업무환경, 갑질피해 사례 등에 대해 전국적인 실태조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병무청은 △의식주 관련비용이 지원되고 있고 △겸직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높으며 △사복요는 보조·지원 업무만을 담당하고 있고 △복무기관 변경도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사복요의 노조 설립 및 실태조사 등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가 지난 2주 동안 운영한 긴급제보센터에 접수된 피해사례를 살펴보면, 이 씨의 사례를 비롯해 △병무청 복무지도관이 행한 인권유린 △겸직 불승인 사례 △출퇴근 중 생계유지가 불가능한 사례 △부당업무 지시 및 부당 대우의 사례 △공무상 병가의 미인정 사례 등 병무청의 해명과는 반대되는 사복요 인권침해 사례만 15건에 이르렀다.
하은성 사회복무노조 사무처장은 "단 2주 동안 신고된 제보 사례만 이 정도인데 전체 사회복무요원들로 범위를 확장하면 어떻겠나" 물으며 "상황이 이러한데 병무청에서 실태조사를 거부하고 있다. 노조는 직접 복무환경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순표 사회복무노조 위원장은 "국가의 방임 속에서 요원들은 복무지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무리한 노동을 강요당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라며 "사회복무제도 하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는 물론, 사회복무제도의 존폐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은 당초 서울지방병무청 내에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병무청이 "물리적 충돌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이를 불허해 병무청 앞 도로에서 이루어졌다. 노조 측은 "휴무인 일요일에 진행하는 기자회견은 업무방해에도 해당하지 않아 막을 근거가 없는데 이같은 조처를 이해할 수 없다"라며 반발했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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