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인문학이 필요한 시간] 내 인생 쓰라린지 향기로운지 신발은 다 알고있다
◆ 매경 포커스 ◆
#1.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파이스토스(Hephaestos)는 화산과 대장간의 신이다. 그는 대장장이이면서 건축기사였고 갑옷과 이륜전차 제조자였다. 하지만 나는 헤파이스토스 하면 구두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는 신들에게 황금으로 된 구두를 만들어주는 역할도 했다. 그는 왜 구두를 만드는 일을 했을까. 신화나 신화 해설서에는 헤파이스토스가 구두 만드는 일을 한 계기는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헤파이스토스가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구두를 만들었을 거라고 말이다. 내 추론은 이렇다. 헤파이스토스는 다리를 절었다.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둘이 부부싸움을 할 때 어머니인 헤라 편을 들었고, 분노한 제우스가 천상에서 지상으로 그를 던져버렸다. 그때 추락하면서 다리를 다쳤다.
헤파이스토스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구두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헤파이스토스와 비교할 건 아니지만 나도 발에 콤플렉스가 있다. 어린 시절 축구를 하다 발등(정확히 말하자면 발등에서 발가락이 갈라져 나오는 부분)을 크게 다쳤다.
당시 나는 며칠 아프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다친 부분을 방치했다. 그러다 계속 통증이 있어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더니 골절이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뼈가 비틀어진 상태에서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다. 결국 발등이 볼록 튀어나온 상태로 뼈가 굳었고 나는 평생 독특한 발모양을 하고 살게 됐다. 물론 걷거나 뛰는 데는 문제가 없고 군대도 다녀왔으니 사는 데 큰 지장은 없다.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신발을 신을 때다.
오른쪽 발등이 약간 튀어나와 있으므로 왼쪽에 맞는 치수의 신발을 신으면 오른발이 좀 불편하다. 걸을 때 통증이 좀 있고 신경이 많이 쓰인다. 그나마 편한 운동화를 신으면 괜찮은데 직장인으로 살다 보니 마냥 편한 운동화만 신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양쪽 사이즈가 서로 다른 신발을 구입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다. 맞춤구두를 신어보기도 했는데 그것도 번번이 하기엔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끈을 묶는 신발을 신는 것이었다. 왼쪽은 끈을 단단히 졸라매고, 오른쪽은 끈을 느슨하게 신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발의 특정 부분이 튀어나와 있으니 신발에서 발을 넣고 뺄 때 걸리적거린다. 그래서 신발 벗을 때 일일이 끈을 풀고 다시 묶게 된다. 이 때문에 "술값을 안 내려고 신발끈을 오래 묶고 있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 술자리가 끝날 기미가 보이면 먼저 나가서 신발을 신고 기다리기도 한다.
어쨌든 오른쪽 발등 때문에 나는 신발을 고를 때 매우 신중하다. 발등에 자극을 덜 주려면 재질이 부드러워야 하고, 끈을 묶는 부분이 넓을수록 좋고, 여기에 내가 원하는 모양과 색깔까지 만족시켜야 하니 마음에 드는 신발 고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신발은 내게 쉬운 존재가 아니다. 내게 신발을 구입하는 일은 양복을 사거나 의자를 구입하는 일보다 중요하고 민감한 일이다.
언젠가 왁자지껄한 대형 음식점에서 신발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내 구두를 신고 간 사람에게 퍼부을 수 있는 모든 저주를 퍼부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그 불편함이 기억에 남아서인지 음식점에 가거나 문상을 가거나 하면 좀 예민해진다. 이래저래 신발은 내 일상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원죄처럼.
#2.
이란의 감독 마지드 마지디의 영화 중에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에서도 꽤 인기를 얻은 작품인데 이 영화의 주요 모티프는 '운동화'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알리는 실수로 여동생 자라의 신발을 잃어버린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남매는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조르는 대신, 운동화 한 켤레를 두 명이 신는 불안한 생활을 시작한다. 오전반인 자라가 집에 오면 오후반인 알리가 그 운동화를 신고 학교를 향해 전력질주하는 영화 장면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3등 상품으로 운동화가 걸린다. 알리는 오로지 운동화를 타기 위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3등이 아닌 1등을 하게 된다. 너무 잘 달린 것이다. 1등을 하고도 고개를 떨구는 소년의 모습은 많은 관객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난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운동화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면 영화가 이토록 감동적일 수 있었을까. 만약 알리가 잃어버린 것이 장난감이었다면, 자전거였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가방이거나 필통, 혹은 돈이었다면 어땠을까. 이토록 가슴이 아팠을까.
운동화는 이들에게 자유를 의미했다. 운동화는 이 남매를 학교로 갈 수 있게 해주는 방주였고, 그들에게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구름으로 만든 비행기 같은 것이었다.
물론 영화는 남매의 아버지가 자전거에 운동화를 싣고 가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해피엔딩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누구에게나 운동화에 관한 기억은 있게 마련이다. 내게도 마찬가지다.
잊을 수 없는 흰 운동화가 있다. 10대 후반 무렵 첫사랑과 관련되어 있는 추억이다. 그때 같은 동네에 살던 동갑내기 여학생이 있었다.
아주 말랐고, 크고 검은 눈이 인상적이었던 우울한 소녀였다. 교복 세대였던 우리는 어른이 드나드는 곳에 드나들 수 없어 만나면 하염없이 걸었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우리는 걸었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도 걸었다. 나란히 길을 걷는 내내 나는 습관처럼 소녀의 발을 내려다봤다. 작은 발에 신겨져 있는 흰 운동화. 그 운동화가 왜 그렇게 마음에 남았는지.
소녀는 그렇게 늘 흰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검은 교복과 흰 운동화는 잘 어울렸다. 우리는 대학에 들어갈 무렵 헤어졌다. 무엇인가 동네를 벗어난 더 큰 미래가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된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났다.
7가지 색 볼펜으로 썼던 7장의 연서도, 밤잠 설치며 접은 종이학도, 그녀가 내게 주었던 시가 수놓여 있던 손수건도, 둘이 함께 지나다녔던 혜화동 로터리의 분수도 이젠 없다.
하지만 그녀의 흰 운동화는 내 뇌리에 남았다. 그리고 시가 한 편 남았다.
그대가 젖어 있는 것 같은데 비를 맞았을 것 같은데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너지는 노을 앞에서
온갖 구멍 다 틀어막고 사는 일이 얼마나 환장할 일인지
머리를 감겨주고 싶었는데 흰 운동화를 사주고 싶었는데
내가 그대에게 도적이었는지 나비였는지
철 지난 그 놈의 병을 앓기는 한 것 같은데
내가 그대에게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살지 않는 것 이 나라에 살지 않는 것
이 시대를 살지 않는 것
내가 그대에게 빗물이었다면 당신은 살아 있을까
강물 속에 살아 있을까
잊지 않고 흐르는 것들에게 고함
그래도 내가 노을 속 나비라는 생각
-'내가 나비라는 생각' 전문
신기한 건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흰 운동화를 사주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를 몇 년 동안 만나면서 단 한 번도 발 치수조차 묻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아마 두려웠을 것이다. 그녀의 작은 발을 소유하는 것이 버거웠던 것 같다. 발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기에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3.
이집트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카이로에서 5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바하리야사막에 갔을 때 일이다. 당시 기온은 40도를 넘었고 낮 시간 달궈진 땅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3일째쯤 되었을까. 신발 밑창이 떨어져나가 버렸다. 원인은 간단했다. 온도 때문이었다.
중위도 온대지방에 맞춰 만들어진 접착제는 열사의 땅에선 소용이 없었다. 열기 때문에 접착제가 녹아 떨어져 신발 밑창에 틈이 벌어지고 그 틈 사이로 모래가 들어가니 밑창은 맥없이 떨어져나가 버렸다.
문제였다. 아직 여행은 많이 남아 있었고 마땅한 신발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내 특이한 발의 특성을 만족시키는 신발은 더더욱 구하기 어려웠다. 결국 현지인이 주로 신는 신발을 하나 구했다. 자동차 폐타이어 같은 걸로 만든 일종의 샌들이었다. 샌들 형태로 되어 있어서 특이하게 생긴 발을 집어넣기에는 적당했지만 문제는 발바닥이었다.
거칠거칠한 타이어 표면이 발에 닿자 발은 금방 허물이 벗겨졌고 피까지 나기 시작했다. 거기다 태양열에 지열까지 더하니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보낸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가시 면류관을 쓴 것처럼 고행 속에 보내야 했다.
그곳 사람들의 발은 나의 발과는 달랐다. 낙타나 양의 발처럼 투박하고 거칠었다. 도시의 발과 사막의 발은 달랐다. 인간의 발은 원래 약했던 게 아니라 약해진 것이었다.
좋은 신발 때문에 우리는 약한 발을 가져야 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신발 없이 하루도 살지 못한다. 신발이 보호하고 신발이 규정해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떤 신발을 신느냐에 따라 어떤 삶을 사느냐가 정해지는 것 아닐까.
신발은 신성하다. 인간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장 낮은 곳에서 흙과 만나지만 신발은 신성하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존경을 표할 때나 죽을 때 신발을 벗는다. 이력서의 '이(履)' 자는 신발을 뜻한다. 즉 신발을 타고 다닌 역사를 쓴 문서가 이력서다. 상징적이다.
신발은 천하다. 더러운 모든 것과 만나면서 인간의 발을 더러운 것으로부터 보호한다. 신발은 스스로 천해져서 운명을 다한다. 가장 낮은 것과 만나기에 가장 빨리, 가장 처절한 모양으로 수명을 다하는 물건이 신발이다.
신발은 신성하면서 동시에 천하다. 탈속과 범속을 넘나드는 신발은 한 인간의 생이 담긴 경전이다. 나는 나의 신발이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내 카드서 돈 술술 빠진다”…모르고 했다가 낭패보는 ‘이것’ - 매일경제
- 들었다 하면 품절…38만원짜리 ‘김건희 순방백’ 뭐길래 - 매일경제
- ‘네쌍둥이’ 경사도 잠시…산후도우미 지원자 없어, 한달간 발동동 - 매일경제
- “신입초봉 5천, 점장 평균 33세”…‘노재팬’ 딛고 채용문 활짝 연 이 회사 [인터뷰] - 매일경제
- 1065회 로또 1등 14명…당첨금 각 18억5000만원 - 매일경제
- 尹 “핵 보유시 포기해야 할 가치들 있어” - 매일경제
- “홈쇼핑 누가 보냐고요?”...옷 하나로 엄마들 마음 훔친 20대 MD [인터뷰] - 매일경제
- “백악관에 또 와달라”…한미정상 부부에 감동 전한 한인 아이들 - 매일경제
- 2030세대 ‘알뜰폰 엑소더스’에…청년혜택 확 키운 이통3사 [아이티라떼] - 매일경제
- 듀란트, 나이키와 종신계약...MJ-르브론에 이어 세 번째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