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독립운동가는 ‘일본인’이다…조선을 사랑했던 두사람

이지혜 2023. 4. 3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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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매달 독립운동가를 선정해 그 정신을 기리는데 5월의 주인공은 '일본인'이다.

모두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편에 서서 일본과 싸워온 이들이다.

조선을 사랑했던 일본 국적의 아나키스트, 히로히토 일왕 암살을 모의하다 체포된 사형수 가네코 후미코 선생이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고 국가보훈처가 30일 밝혔다.

1879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재일 조선인 유학생을 변호하면서 조선과의 연대 활동에 나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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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함께 일제에 대항한
가네코 후미코·후세 다쓰지
‘5월의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국가보훈처는 매달 독립운동가를 선정해 그 정신을 기리는데 5월의 주인공은 ‘일본인’이다. 모두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편에 서서 일본과 싸워온 이들이다.

조선을 사랑했던 일본 국적의 아나키스트, 히로히토 일왕 암살을 모의하다 체포된 사형수 가네코 후미코 선생이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고 국가보훈처가 30일 밝혔다. ‘일본의 쉰들러’로 불린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 선생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가네코는 기구한 가족사로 인해 조선에 살고 있던 고모부의 양녀로 자랐다. 1919년 조선에거 3·1 운동의 열기를 몸소 겪은 가네코는 일본 외가로 돌아갔다가 1922년 재일 조선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와 동지이자 연인으로 인연을 맺었다. 가네코는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로 구성된 재일 조선인 단체 ‘흑도회’에 몸담고 노동자 후원과 친일파 응징 활동, 무정부주의 운동을 펼쳤다.

가네코는 1923년 박 의사와 함께 히로히토 일왕과 왕세자를 암살을 모의한 혐의로 일제에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그는 당시 법정 심문에서 “나는 천황이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인간이지 결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폭탄을 던져 천황도 우리와 똑같이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했다. 옥중에서 박 의사와 혼약을 맺은 그는 1926년 2월 도쿄에서 열린 첫 공판에 흰 한복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출두해 자신의 이름을 “박문자”라고 밝혔다. 같은 해 3월26일 최종 공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자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27년 1월21일치에 가네코 후미코 선생과 박열 의사의 법정 사진 기사가 실렸다. 국가보훈처 제공

옥에 갇혀 조사를 받을 무렵, 두 사람이 서로를 다정히 끌어안고 찍힌 정체불명의 사진이 유포된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재판부가 증거확보 목적으로 두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진을 찍어준 사실이 알려져, 일본 정치권에서 사법권 문란으로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는 등 후폭풍이 일었다. 이를 둘러싼 이야기가 2016년 영화 <박열>에서 다뤄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가네코는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옥살이 도중인 1926년 7월, 23살의 나이로 옥중에서 숨졌다. 당시 일제는 그의 죽음을 자살이라 발표했으나, 아직 의혹으로 남아 있다. 그의 유해는 박 의사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묻혔고, 옥사한 지 92년 만인 2018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영화 <박열> 스틸컷. 왼쪽이 영화속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5월의 독립운동가’ 후세 다쓰지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가네코의 변호인이었던 후세 다쓰지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후세는 훗날 ‘일본의 쉰들러’로 불린 인권변호사로 평생 약자를 위해 싸워왔다. 1879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재일 조선인 유학생을 변호하면서 조선과의 연대 활동에 나서왔다. 그는 수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의 변호인을 자임했고 일왕 암살 모의 혐의를 받은 가네코와 박열을 위해서도 법정에서 싸웠다. 가네코의 유해를 거둬 한국으로 운구한 것도 그였다.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후세는 1932년 법정 모독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1933년에는 신문지법, 우편법 위반으로 금고 3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일제 패망 후 다시 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새로운 평화헌법 보급과 재일 조선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투쟁에 매진하다 1953년 별세했다. 정부는 후세에게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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