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안보’인 시대, 커지는 러시아와 중국 리스크 [권상집의 논전(論戰)]
상황에 따라 각기 입장 달리하는 英․ 佛․獨 태도 되새겨야
(시사저널=권상집 한성대 사회과학부 교수)
윤석열 대통령이 러시아와 중국의 적대적 행위에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 내용이 발단이었다.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중국에 '대만'은 금기어나 다름없다. 윤 대통령은 이 금기를 깨뜨렸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가능성을 열어놨고, 대만 이슈에 대해서는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러시아와 중국은 해당 인터뷰가 공개되자마자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제2의 사드 사태 터질라" 재계 걱정
인터뷰가 공개된 후 러시아와 중국은 곧바로 내정간섭이라며 불쾌감을 넘어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다.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은 "러시아가 북한에 최신 무기를 지원하면 한국 국민이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며 북한에 대한 무기 지원 카드를 꺼내들었다. 중국은 "대만 문제에 관해 불장난하는 이는 불타 죽을 것"이라는 협박성 메시지를 전달했다. 러시아와 중국의 공포 분위기 조성에 국내 기업은 좌불안석이다.
일단 러시아를 살펴보자. 러시아에 진출한 국내 기업은 현재 150개가 넘는다. 이 중 러시아 시장에 가장 적극적으로 진출한 기업은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대표 기업들이다. 참고로, 현대자동차와 LG전자는 2020년까지 러시아 시장에서 선전했으나 현재는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생산공장 가동을 모두 중단한 상황이다. 러시아에서 잘나가는 국내 제품이 초코파이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도 농담은 아니다.
중국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중국은 이미 2016년 사드 배치 이후 롯데그룹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을 향해 경제 보복의 타격이 얼마나 매서운지 보여준 국가다. 전 세계 모든 국가는 현재 중국 경제에 비대칭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유럽이 러시아에 대해선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반면 중국에 관해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다. 중국은 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경제 보복을 늘 책략으로 활용한다.
대한민국이 수출 중심 국가라는 건 국민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대통령이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이 돼 국내 기업의 활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언급한 것도 수출이 막히면 한국 경제의 성장이 멈추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국내 대기업의 영업이익이 하락하고 공장 가동 중단이 이어지는 상황, 그리고 중국과의 무역에서 줄곧 적자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발생한 이번 리스크는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러시아와 중국은 입으로만 강경함을 취하는 국가가 아니다. 러시아는 에너지 무역에서 20% 비중을 차지하는 강점을 내세워 각종 제재 속에서도 높은 석유 및 가스 가격을 토대로 자국 경제에 미치는 압박을 최소화하며 미국과 유럽을 견제하고 있다. 중국은 보복 조치를 통해 한국 경제를 훼손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 푸틴과 시진핑은 전 세계가 에너지와 제조업 분야에서 자신들 국가에 의존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해당 상황을 감안할 때, 에너지에 강점을 갖고 있는 러시아가 전자, 자동차, 식품 시장에 진출한 국내 기업을 통제하고 압박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중국은 우리의 최대 수출국 중 하나다. 러시아와 중국이 우리를 향해 빗장을 걸어잠근다면 기업들은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고, 이는 한국 경제의 난관으로 이어진다. 수출과 수입이 막히면 투자는 감소하고 식료품 가격은 상승하고 일자리는 줄어든다.
사실 대통령이 러시아와 중국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을 한 건 아니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힘에 의해 세계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를 찬성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예컨대, 학교폭력 상황에서 가해자가 약자를 괴롭히며 약자의 것을 빼앗으려고 할 때 가해자를 비판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개인의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개인과 국가의 행위 그리고 발언의 무게는 엄연히 다르며 또 달라야 한다.
우리 정부는 경제가 안보, 안보가 경제라고 얘기한다. 우리만 그렇게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전 세계 모든 국가는 경제를 안보의 테두리에서 해석한다. 대한민국의 고민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우리나라의 외교정책은 미국과 안보, 중국과 경제라는 큰 줄기 아래 줄곧 진행됐다.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해 지지하면 경제 또는 안보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략적 모호성의 줄타기를 해왔다.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중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만든 것도, 그리고 미국의 반대에도 중국 주도의 아시아투자은행에 가입한 것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였다. 문재인 정부 역시 초기부터 중국과의 관계 회복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러시아와 중국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경제의 지속 성장, 더 나아가 국민 안전과 국가 안보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숙명이다.
외교에 '전략적 모호성'이 필요한 이유
작고한 하버드대 정치학과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외교 관계는 초등학교 서열 경쟁보다 더 유치하고 때로는 비열하다"고 얘기했다. 영원한 우방도 그리고 영원한 적도 없기에 상대를 너무 믿어서도 안 되고 상대와 등을 돌려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미국이 지금도 변함없이 동맹국에 대해 모든 정보망을 총동원해 도청을 자행하는 이유다. 그리고 미국은 불리한 상황에선 늘 전략적 모호성의 스탠스를 유지한다.
우리 정부가 러시아와 중국에 저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경제가 안보인 상황 그리고 안보가 경제인 시대에 상대와 등을 지는 행위는 위험한 일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이 상황에 따라 각기 입장을 달리 취하는 것도, 일본이 러시아와 중국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보이지 않는 것도 경제가 안보, 안보가 경제인 시대에 상대와 등을 돌리는 건 자국 국민 그리고 경제에 미칠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아시아 안보동맹의 축을 미·일에서 한미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에 대해 모호성이 아닌 선명성을 유지하는 것도 그 일환으로 보인다. 그러나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얘기처럼 외교 관계는 유치하고 때로는 비열하다. 정부가 귀 기울이며 신뢰할 대상 역시 우리 국민과 기업의 목소리다. 경제가 안보이며 안보가 곧 국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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