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원 수액' 위해 1600억 투자…'신약 꽃밭' 만들고 떠난 이종호 명예회장
이종호 JW그룹 명예회장이 30일 오전 7시 49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이 명예회장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 전날 병세가 급격히 악화했으며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에 들었다. 장례는 JW그룹 회사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연세대학교 신촌장례식장 특1호실에 마련됐다. 조문은 5월 1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발인은 5월 3일 오전 7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장지는 경기도 연천군 중면 횡산리다.
이 명예회장은 1945년 광복둥이 기업으로 탄생한 JW중외제약에서 '제약구세'(製藥救世)의 일념으로 필수의약품부터 혁신신약까지 '약 다운 약'을 만들어 국민 건강을 지키는 '제약보국'(製藥保國) 실현에 앞장섰다. '생명존중'과 '도전정신'의 경영이념 아래, 대한민국 제약 산업의 발전과 보건의료 기반 향상에 평생을 바쳤다.
1966년 회사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이 명예회장은 1969년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합성 항생제 '리지노마이신' 개발에 성공했다. '리지노마이신'은 국내에서 선풍적인 반응을 이끌었으며, 경영위기로 어렵던 회사의 기틀을 다지고 국내 제약 산업을 한 단계 진보시키는 역할을 했다. '리지노마이신'은 1973년 12월 영국 약전(B.P)에도 수록돼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1969년 5월 19일 발명의 날에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항생제 합성 분야에서 큰 성공을 이룬 이 명예회장은 1974년 당시 페니실린 항생제 분야 최신 유도체로 평가받던 피밤피실린의 합성에도 성공, '피바록신'을 개발하며 기술력을 입증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해외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국내 제약 산업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머크, 애보트 등 유럽 및 미국 주요 제약사들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국내 시장에서 기술적 입지를 굳혀나갔으며, 이들과의 협업을 통해 전문 치료의약품 중심의 사업을 확대했다. 이는 1970년대부터 이어진 고도성장의 기반이 됐다.
이어 1970년대 초반에는 기초원료 합성과 생산을 위한 연구에 집중, 국내 최초 소화성궤양 치료제 '아루사루민', 진통·해열제 '맥시펜', 빈혈치료제 '훼럼', 종합비타민 '원어데이' 등 신제품들을 시장에 선보이며 포트폴리오를 확장해 나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2월 제14대 한국제약협회장 취임하며, '기업윤리관 확립', '환경변화 대응능력 배양', '협회의 조직기능 효율화와 위상 제고' 등 3대 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 명예회장은 1970년대에 수액 한 병 납품할 때마다 원가가 안 나와, 팔수록 손해인 수액사업을 이어갈지 고민했다. 하지만 병원 불빛을 보며 "지금 이 순간에 저기서 꺼져가는 생명이 있는데 돈이 안 돼서 그만둔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선친이 몸소 실전했던 생명존중의 창업정신을 이어가 오늘이 됐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JW그룹은 1997년에 국내 최초로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지 않는 Non-PVC 수액백 개발에 성공, 친환경 수액백 시대를 열었으며, 2006년에는 1600억 원을 투자해 충남 당진에 세계 최대 규모의 수액제 공장을 신설, 글로벌 생산 기지를 구축했다. 당시 이 명예회장은 "내가 충남 당진에 1600억원 들여서 한 개에 1000원 정도 하는 수액 생산 공장 짓는다니까 다들 '우리 시대의 마지막 바보'라고 했다"고 말했다.
JW그룹은 당진 수액공장을 기반으로 2019년에는 자체 기술력으로 개발한 3체임버 종합영양수액 '위너프(수출명:피노멜)' 완제품을 아시아권 제약사로는 최초로 영양수액 세계 최대 시장인 유럽 시장에 수출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75년 당시 중외제약의 사장으로 취임하며 이종호 명예회장이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신약개발'이었다. 여기에는 "생명을 다루는 제약기업은 이윤도 중요하지만 약다운 약을 생산해야 한다"는 창업정신이 밑바탕 됐다.
이 명예회장은 "신약 개발로 돈을 벌어야지, 해외에 있는 약을 수입해서 판매해 이윤을 많이 남긴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이 명예회장은 R&D 역량을 키우기 위해 국내에 신약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1983년 중앙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86년에는 신약개발 연구조합 초대 이사장에 추대돼 업계 공동 연구개발을 통한 기술 향상과 글로벌 진출 기반 구축 등 국내 제약업계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1992년에는 오늘날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의 시초라 할 수 있는 국내 최초의 합작 바이오벤처 'C&C신약연구소(현 JW중외제약 지분 100%)'를 일본 주가이제약과 50:50 지분 투자를 통해 설립했다. 2000년에는 미국 시애틀 연구소인 JW 세리악(Theriac, 현재 미국 보스턴 소재)을 설립하는 등 글로벌 R&D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를 발판으로 2001년에는 국내 최초의 임상3상 신약 1호인 항생제 '큐록신' 허가를 획득하는 성과를 냈다.
JW중외제약은 오늘날까지 그 정신을 이어받아 혁신신약 중심의 R&D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치료의약품의 개발에 힘쓰고 있다. 주요 신약 후보물질 가운데, 기술수출에 성공한 아토피피부염 치료제와 통풍 치료제는 글로벌 임상을 진행 중이며 탈모치료제와 표적항암제 또한 임상 1상 진입을 목표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이 명예회장은 신약 관련, "꽃은 아직 안 피었지만 꽃밭은 내가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된 거죠. 직원들 앞에서 내가 말한 적이 있어. 내가 죽기 전에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신약 개발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하지만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걸 개발할 수 있는 길이라도 닦아놓으면 나는 만족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이 명예회장은 2011년 사재 200억 원을 출연해 공익재단인 중외학술복지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으로서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데 앞장섰다. 중외학술복지재단은 보건의료 분야 학술연구와 소외계층 지원을 위해 설립된 공익법인으로, 지역사회 대상 봉사활동과 기초과학자 주거비 지원 사업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진행 중이다. 2013년에는 창업자인 고(故) 성천 이기석 선생을 기리고 고인이 평생 실천했던 생명존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성천상'을 제정, 음지에서 헌신적인 의료봉사를 통해 의료 복지 증진에 기여하며 사회적 귀감이 되는 의료인을 발굴해 그 업적을 기리고 있다. 지난해까지 총 9명의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했다.
안정준 기자 7up@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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