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아카데미 또 헐릴 위기… “단순 극장 아닌 기억 유산” [뉴스 인사이드-단관극장의 존재 이유]
폐관 14년 만에 다시 극장 문열어
시장 바뀌자 복원사업 전격 중단
“60년 역사 허물고 주차장이 웬말
문화콘텐츠 시대 역행하는 발상”
옛 건물 그대로 둔 채 내부시설 현대화
광주극장 ‘지역공동체 극장 모범’ 제시
강원도 원주시 시의회 앞 광장. 헐릴 위기에 처한 아카데미극장을 지켜내자는 시민들의 철거 반대 목소리가 연일 커지고 있다.
“원주에서 초·중·고를 나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시민은 “30살에 타지에 나아가 30년을 살고, 60살이 되어 돌아왔다”며 “수많은 이들의 소중한 추억이 쌓여 있는 곳을 없애고 주차장을 지으려는 당국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말하려고 하면 눈물부터 난다”는 30대 주부는 “엄마 아빠 손잡고 처음 갔던 극장이고 내 아이도 데려가고픈 곳인데, 애 키우는 내가 왜 이리 상처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아카데미극장에서 ‘해리포터’를 봤는데, 그 기억을 통째로 날리려 하느냐”고 따지는 열여덟 살 당찬 여고 2년생도 나왔다.
“대구 출신이지만, 원주에서 22년째 거주 중”이라며 마이크를 잡은 50대 남성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원주시민이기 때문에 나서서 지키려는 것”이라고 외쳤다.
원주시는 지난해 2월 아카데미극장 부지 매입을 완료했고,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년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에 선정돼 국비 15억원, 도비 4억5000만원을 확보해 극장을 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민선 8기는 지난해 7월 돌연 극장 철거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카데미극장 보존을 위한 시민 모임 ‘아카데미의 친구들’이 시정토론을 요구하며 피켓 시위에 나서자, 원 시장은 비공개 면담을 제안했다. 이 자리에서 원 시장은 ‘여기 원주분들이 있는가’, ‘나이가 몇 살인가’, ‘아카데미극장에서 영화를 본 적 있는가’ 등을 묻고, “검토해보겠다”며 30분간의 면담을 마친 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철거를 발표했다. 이쯤 되자 원주 시민 6만명이 활동하는 맘카페 ‘원주파랑맘’도 시위에 동참했다. 시의회 유오현 문화도시위원장은 지난 17일 원주파랑맘 대표 2인과 아카데미의 친구들 대표 2인을 불러 간담회를 열고 “문화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주성 ‘아카데미의 친구들’ 수호대장은 “담당자들이 문화자산의 가치를 모른다는 점이 가장 안타깝다”며 “대통령도 스스로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이라며 문화콘텐츠 산업 육성에 나서는데, 왜 원 시장만 거꾸로 철지난 개발경제 논리에 매달리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1963년 개관한 원주아카데미극장은 올해 환갑이다. 단지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원주시 근현대건축을 대표하면서 ‘1960년대 한국 극장건축에서 모더니즘의 미학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유지한 공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상영관에서 초등학교 졸업식이 열리는 등 극장을 넘어 마을의 커뮤니티 공간으로도 존재해왔다.
오래된 단관극장은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문화콘텐츠다. “극장은 문화공간이자 이야기의 공간”이라는 이명세 감독은 “오래된 공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있다”고 입을 뗀다. “누군가는 거기서 연애를 했을 거고 누군가는 고달픈 날 위로받았을 거다. 오래된 문화공간이야말로 세대를 넘어 교류할 수 있는 매개체다. 이 사연 많은 극장을 주차장으로 만드는 건 문화콘텐츠 시대에 역행하는 발상 아닌가.”
신수원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 가면 100년 넘은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한다”며 “그같은 공간을 가졌다는 게 부럽다”고 말한다. “우리에겐 광주극장이나 원주아카데미극장 정도가 남아 있는데 60년 건물을 부수고 차 20대를 댈 주차장을 만든다니 암담하다”고 심정을 털어놓는다.
원주 아카데미극장 주변에는 맛집들이 즐비하고 재래시장과 개천, 그리고 넓은 주차장 후보지가 이미 있다. KTX가 다닐 만큼 교통 인프라도 갖췄다. 그는 “추억팔이 때문에 극장을 보존하자는 게 아니다”며 “원주가 지닌 좋은 자원을 활용하면 오히려 숨죽은 구도심을 더 효과적으로 살릴 수 있다”고 제언했다.
◆동두천 동광극장 ‘옛 것과 새 것의 조화’
대한민국 영화의 위상은 이미 세계적이다. 칸, 베니스, 베를린 세계3대 영화제 석권에 이어 아카데미상도 거머쥐었다. 이제 그에 걸맞게, 몇 곳 안 남은 오래된 단관극장도 보존할 줄 알아야 한다.
옛날 영화관의 복고풍 감성을 고수한 덕분에 여기서 드라마 ‘시그널’과 ‘응답하라 1988’의 극장 신을 찍어갔다.
“코로나19 때도 어려웠지만 사실 지금이 가장 심하다. 집 안에 머무는 동안 대형 모니터를 설치하고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영화를 보는 환경이 자리 잡았다. 동광극장은 이미 명소로 알려져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그러나 영화는 안 보고 사진만 찍고 간다.”
전국적인 ‘명소’이니 끝까지 이를 지켜달라고 개인에게 맡겨놓기엔 이제 너무 버거운 일이 되었다. 개인 사업자이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무책임하다. 동광극장은 주변 식당가나 인근 외국인관광특구 등에도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해당 정부 기관과 자치단체의 지원이 필요하다. 시도기념물로 지정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동두천의 역사이자 대한민국 극장사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여전히 살아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최근 문화가 부각되는 이유는 경제적 가치에 있다. 고부가가치의 원천이자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영화와 같은 문화콘텐츠가 더욱 주목받는다. 확실한 미래산업이자 전략산업이다. “21세기는 문화산업에서 각국의 승패가 결정될 것이다. 최후 승부처가 바로 문화산업이다”라는 피터 드러커의 말이 크게 들린다.
원주=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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