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멘터리] 디자이너들이 꼽은 최고의 영화 포스터는?
극장가의 최대 장은 여름에 섭니다. 가장 먼저 올 여름 개봉일을 확정하며 출사표를 던진 영화는 류승완 감독의 “밀수”입니다.
지난해 여름 시장에서는 “외계+인”, “비상선언”, “한산”, “헌트” 등 한국 영화 대작 4편이 한 주 건너 잇달아 개봉하면서 서로 손해를 보았던지라 올해도 눈치 보기가 치열할텐데 어쨌든 “밀수”가 먼저 닻을 내렸습니다. (배급사인 NEW와 홍보사인 호호호비치가 보낸 메일에서는 ‘개봉일 밀당 없이 시원하게 7월 26일 개봉 확정, 오라이!’라는 재미있는 문구를 달았더군요)
‘해양범죄활극’으로 콘셉트를 잡은 “밀수”의 런칭 포스터는 최근 한국 영화 포스터에서 익히 보아오던 패턴을 벗어난 것 같아 신선합니다. 포스터부터 자신감이 넘친다고나 할까요. 비록 ‘런칭 포스터’이긴 해도 김혜수와 염정아를 거의 실루엣으로만 작게 처리하고 노을이 번지는 하늘과 갈매기를 시원하게 배치한 디자인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입니다.
이 포스터를 만든 프로파간다의 최지웅 실장은 다음 달 개봉하는 상반기 최고 기대작 “범죄도시3”의 포스터 디자인도 맡고 있습니다. “범죄도시3”의 런칭 포스터는 “밀수”와 정반대 스타일입니다. 팔뚝이 강조된 마동석 원샷이 포스터를 가득 채울 때, 관객들은 이 영화가 ‘마동석의, 마동석에 의한, 마동석을 위한’ 영화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습니다.
지난해 여름 시장에서는 스테디의 안대호 실장이 바빴습니다. 안 실장은 2021년 여름에 유일하게 300만 관객 수를 넘긴 “모가디슈” 포스터를 제작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이른바 한국 영화 빅4 중 “외계+인”, ”한산”, “비상선언” 등 3편의 포스터를 디자인했습니다. 화제작 “헤어질 결심”의 국내 포스터도 그의 손을 거쳤습니다.
한눈에 봐도 알만한 영화 포스터들을 제작한 최지웅, 안대호 두 디자이너를 만나 요즘엔 굿즈로 수집 대상이 되기도 하고, 관람 여부 판단에도 영향을 미치는 영화 포스터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습니다.
- 영화 흥행에서 포스터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요?
- 일단 (영화가) 망하면 제일 먼저 욕을 먹는 게 포스터와 예고편이죠. 그건 확실합니다.
서울 서교동 스테디 작업실에서 만난 안대호 실장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습니다. 에두른 답변이지만 포스터의 역할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 이상의 설명으로 들렸습니다. 포스터는 영화의 첫 인상이자, 그 영화의 정체성을 한 장에 압축한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화 마케팅은 포스터에서 출발합니다. 개봉 예고든, 제작 발표회든, 시사회든 모든 홍보 일정은 포스터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심지어 요즘에는 새로운 포스터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홍보 내용이 되기도 합니다.
솔직히 최근 한국 상업영화의 메인 포스터들은 다소 뻔한 감이 있습니다. 메인 포스터는 흥행 부담 때문에 모험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습니다. 사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포스터도 비슷비슷한 패턴의 반복이기는 마찬가지인데요, 그래도 한국 영화 씬에서 포스터와 외국 영화 씬에서 포스터 스타일의 차이를 통해서 한국 영화 포스터의 특징을 살펴봤습니다. 먼저 2016년 칸 영화제에 초청됐던 “부산행” 포스터를 보시죠.
“부산행”의 국내 포스터(좌)에는 공유, 정유미, 마동석 같은 주연 배우들이 좀비들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반면 칸 영화제 때 사용한 포스터(우)에는 배우들은 전혀 나오지 않고 기차역 부근에 비상 사태가 발생한 듯한 분위기만 묘사돼 있습니다. “부산행”의 국내용과 해외용 포스터를 모두 제작한 최지웅 디자이너의 말입니다.
“한국과 외국이 크게 다른 점은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국은 포스터용 사진을 따로 촬영해서 광고적으로 푸는 경우가 많아요.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내는 거죠. "부산행"의 한국 버전은 배우들 얼굴도 잘 보여야 되고 좀비들에게 쫓기는 상황도 잘 보여줘야 하는 게 콘셉트였기 때문에 주연 배우들이 도망가는 장면을 연출해서 따로 사진 촬영을 했어요.
칸 영화제용 포스터는 배우들의 표정이나 동작보다 이 영화가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스케일이 큰지를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고 제목도 ‘Train to Busan’이기 때문에 제목에 충실한 비주얼을 담았어요. 또 해외에서는 배우들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측면도 있고요.”
아래는 지난해 칸 영화제에 초청됐던 “비상선언” 포스터입니다. 인지도 높은 배우들이 나왔어도 외국용 포스터는 다른 스타일로 제작했습니다.
“비상선언”의 국내 메인 포스터(좌)는 주연인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등을 크게 배치한 전형적인 배우 위주 포스터입니다. 배우들의 표정에서도 긴박한 상황과 감정이 잘 드러나죠. 반면 칸 영화제용 포스터(우)에는 아예 배우들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저 비상 착륙을 시도하는 듯한 여객기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이미지를 활용해 이 영화가 항공 재난 영화임을 분명히 보여줄뿐입니다.
"비상선언" 포스터들은 안대호 디자이너가 만들었습니다.
“한국 포스터가 인물의 감정에 훨씬 더 가깝게 들어간다고 볼 수 있죠. 예를 들어서 쓸쓸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면 해외 영화 포스터는 쓸쓸한 뒷모습 정도에서 끝나는데 한국 영화 포스터는 그 쓸쓸한 모습을 넘어 우는 모습까지 들어가는 거죠.”
안 디자이너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국내 포스터도 디자인했습니다. 박 감독은 영화 포스터도 신경을 많이 써서 제작하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전작 “아가씨”와 “스토커”의 포스터를 작업한 영국의 디자인 회사 엠파이어사가 “헤어질 결심”의 첫 번째 포스터를 만들었습니다.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의 우끼요에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의, 한국 영화 포스터에서는 보기 힘든 묘한 비주얼의 포스터가 신선했습니다. 그런데 박 감독과 배급사는 엠파이어사의 포스터가 국내용 포스터로 쓰기에는 정서적으로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박 감독은 다양한 느낌의 포스터를 보고 싶다면서 안 디자이너에게 또 다른 버전을 주문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아래의 한국 메인 포스터입니다. 그런데 이 한 장의 포스터는 사실 한 장이 아닙니다.
탕웨이의 코트 색깔이 카멜에서 블루 계통으로 바뀌었고, 두 사람 뒤로 번지는 햇살도 삽입됐습니다. 결정적으로, 영화에서는 박해일과 탕웨이의 손이 떨어져 있거나 완전히 포개져 있었는데, 안 디자이너는 두 사람의 약지와 새끼 손가락이 살짝 걸치도록 디자인했습니다. 무심한 듯 창밖을 내다보는 탕웨이나 눈을 감고 있는 박해일의 표정과는 대조적인 가벼운 ‘접촉’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숨막히게 고조시킵니다. 관객들은 눈치채기 힘들지만 이 한 장의 포스터에는 약 일고여덟 장의 스틸 컷들이 조합됐습니다.
그런데 두 선로 구성된 “헤어질 결심”의 타이틀 로고는 엠파이어사 포스터의 로고를 한글에 맞게 수정한 것도 아니고 안대호 디자이너가 만든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박 감독이 또 어디에선가 취향과 안목에 맞는 걸로 디자인해왔겠죠?
디자이너마다 의견은 다르겠지만, 최지웅 디자이너는 영화의 타이틀 로고야말로 그 영화의 얼굴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타이틀 로고만 봐도 그 영화의 장르와 분위기, 스토리를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타이틀 로고가 영화 포스터의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로고 타이틀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이는 편이고요.”
최 디자이너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포스터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의 타이틀 로고를 한국 정서에 맞게 바꿔 관객들이 갖고 싶은 포스터로 꼽을 만큼 호평을 받았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프랑스 오리지널 포스터(좌)는 밤에 아델 에넬만 혼자 서있는 모습을 담았지만, 한국에서는 두 주연 배우가 머리를 맞댄 파스텔 톤의 포스터로 바뀌었습니다. 로고 타이틀도 제목처럼 타오르는 느낌을 주기 위해 최 디자이너가 붓으로 직접 썼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오리지널 포스터에서 타이틀 로고를 수정했습니다. 한글의 자형 특성 상 오리지널 포스터처럼 작게 흩뿌리듯이 들어가면 눈에 잘 안 들어올 것 같아서 덩어리감이 있는 장식적인 서체로 디자인했다고 최 디자이너는 설명했습니다.
“포스터 의뢰를 받으면 제일 처음에 하는 일이 크랭크 인 전 시나리오북 디자인이에요. 거기 타이틀 로고가 들어가죠. 그 단계가 디자인사가 배급사, 홍보사, 감독님 등과 궁합을 맞춰보는 첫 번째 단계예요. 이 단계를 거쳐야 디자인사가 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구나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해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영화 타이틀 로고 중 하나는 “대부(1972)”의 로고로, 나중에 영화 속의 꼴레오네 가문의 이름을 딴 폰트로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인터넷에서 ‘꼴레오네 폰트(corleone font) 폰트를 검색하면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 오리지널 포스터를 늘 맘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블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예산이 많이 투입된 외국 영화는 디자이너에게 타이틀 로고만 겨우 한글로 바꾸는 정도의 자유만 주어집니다. 다음 주에 개봉하는 마블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3”의 오리지널 포스터와 한국 포스터를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올해 아카데미상에서 7개 부문을 휩쓸어 화제가 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개봉 전부터 포스터 마케팅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에브리씽'을 영화의 톤 앤 매너에 맞게 꽉 차게 배치해 호평을 받은 메인 포스터 외에도 눈알 포스터, 돌 포스터, 화양연화 패러디 포스터 등 다양한 포스터를 제작해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포스터 굿즈를 받기 위해 영화 보러 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관객들의 기호도 변하고 있습니다. 배우들 얼굴 위주의 뻔한 포스터보다는 방에 붙여 놓고 싶은 개성 있고 아름다운 포스터들의 수요가 전보다 훨씬 커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흥행 부담이 큰 투자 배급 부문이나 마케팅 쪽에서 적어도 메인 포스터는 영화의 콘셉트가 명확하게 전달되고 가독성이 좋은 포스터를 선호하기 마련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피땀이 들어간 작품이자 상품에 모험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디자이너도 한국 영화계에 몸담고 있는 만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한국 영화의 위기와 포스터 트렌드에 대해 의견을 얘기했습니다.
“코로나 이후로 작업하는 포스터는 딱 간결한 키워드 하나만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게 추세인 것 같아요. 좀 더 직접적이고 쉽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그런 이미지를 원하는 추세인거죠. 코로나 시대 이전처럼 포스터로 스토리텔링을 한다던가 하는 것보다는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장르성이라든가 주연 배우의 변신 같은 데 초점을 맞추서 간결하게 가는거죠. 아무래도 극장으로 관객들을 유입시켜야 하니까…” (안대호)
“(한국 영화) 편수가 확실히 많이 줄기는 했어요. 코로나 시기에는 개봉하는 영화가 없었기 때문에 영화 쪽 일도 거의 없었고…위기라고 한다면 극장 관람료 인상도 있겠지만 예전만큼 다양하고 재미있는 영화가 많이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될 영화만 투자가 돼서 나온다는 느낌도 받고 있고요. 그 와중에서도 제작된 한국 영화를 잘 포장해서 극장으로 오게 하는 게 저희 일이죠.” (최지웅)
한국 영화의 포스터 의뢰는 많이 줄었지만 포스터 디자인 스튜디오들에 오는 작업 의뢰 자체는 오히려 늘었습니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콘텐츠를 쏟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파간다와 스테디도 “지옥”, “D.★P.”, “피지컬 100”, “카지노” 등의 포스터를 디자인했습니다.
극장 영화는 보통 10개 안팎의 포스터를 제작하는데, 스트리밍 서비스는 영화나 드라마 시리즈 당 2~30종의 포스터를 만듭니다. 넷플릭스에 따르면 시청자들이 콘텐츠를 선택하는데 들이는 시간은 평균 1초가 안되기 때문에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 각각의 시청자와 시청 기기에 맞춤한 포스터를 노출합니다. 시청자의 취향에 따라 서로 다른 포스터가 보여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 “길복순”의 경우, 배우의 팬들을 위해 전도연의 얼굴과 액션을 강조한 포스터가 있는가 하면 외국 시청자를 고려해 배우는 뺀 채 범죄스릴러적 요소를 부각한 포스터, 로맨스 장르 팬들을 위해 설경구와 전도연 투샷을 배치한 포스터 등이 만들어집니다. “더 글로리”도 필자가 보는 포스터와 독자 여러분이 보는 포스터는 다를 수 있습니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극장 간판을 손으로 그렸듯이, 포토샵이 없던 시절에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영화 포스터를 그렸습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래 추억의 명작 포스터들도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최지웅 디자이너와 안대호 디자이너에게 인생 포스터를 물었습니다. 먼저 최지웅 디자이너는 제 기억 속에도 뚜렷이 남아 있는 뤽 베송 감독의 “그랑 블루(1988)”을 꼽았습니다.
“이 포스터를 처음 본 게 초등학생 때였어요. 강렬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고, 그 영향을 받아서 인물은 작고 여백은 많아서 영화의 분위기를 잘 담을 수 있는 그런 포스터를 계속 만드는 것 같아요.”
안대호 디자이너는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을 선택했습니다.
“굉장히 많은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이 다 포스터에 들어가 있거든요. 또 레트로한 무드와 사이버틱한 무드를 굉장히 잘 섞었다는 점에서 좋아합니다. 타이틀 로고도 되게 잘 만들었고요.”
그런데 제가 서로 다른 날짜와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상찬한 최근 영화 포스터가 하나 있습니다. 지난해 개봉했던 고 다이애나 비의 불행했던 영국 왕실 생활을 다룬 영화 “스펜서” 포스터입니다. 두 디자이너가 입을 모아 '이런 포스터를 만들고 싶다'고 한 이유는 아래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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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jool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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